연주를 통해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려면 가장 선행돼야 하는 것이 물론 '예배란 무엇인가' 에 대한 접근이겠지만, 본 칼럼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연주자의 마음가짐 또 그에 대한 접근방법이기에 예배의 정의는 수많은 훌륭한 신학자분들과 목회자분들께 맡기도록 하겠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사무엘상 15장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그 어떤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성경적인 '예배의 정의' 가 되겠지만 이를 우리의 논제를 향해 조금 더 발전시키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찬양토록 명령하셨고 이에 대한 순종 또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일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찬양이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이 필자가 이해하는 그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그렇다면,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긴 한 것인가?
그간 만나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해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결론은 '연주란 그것에 집중해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마치 유아반 선생님께서 맡은 일을 위해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찬양’하지 못하더라도 회중들의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순종을 통해 예배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사실 상당히 그럴듯했고, 실제 필자도 우리 교회- Brooklyn Tabernacle Church- 에서 연주자들과 몸을 부대끼기 이전까지 한동안 이 접근에 동의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찬양을 할 때 손을 들거나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거나 또는 박수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이제부턴 '찬양' 이란 단어에 이 의미를 함축하도록 하자)을 크게 방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찬양으로 깊이 들어가고 솔직해 지도록 돕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물론 드럼을 치는 것이나 피아노 건반을 적절히 누르는 것이 박수를 치거나 양 옆으로 움직이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행위들이지만 이론상으론 그런 연주들도 찬양에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문제는 피아노 건반을 적절히 누르고 드럼을 아름답게 두드리는 것이 우리가 박수를 치는 것처럼, 몸을 리듬에 맞게 움직이는 것처럼 “익숙하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부호(Quotation Mark)를 익숙하게라는 단어에 붙인 것은 여기 있는 저 네 글자는 사전적인 느낌의 단순한 정도보다 몇 만 배 더 깊고 무겁기 때문이다.
보지 않아도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말은 쉽지.." 분명히 그렇다. 말로 들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필자가 속해있는 교회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을 해 내는 것, 게다가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는가.
불과 네 문단 만에 엄청나게 먼 길을 온 듯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에, 다음에 이어질 칼럼의 서막을 본 교회에서 사역하며 느끼고 정리한 예배하는 뮤지션으로 가는 네 가지 단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며 열어보도록 하겠다.
먼저 네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단계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가 선택한 악기에 익숙해지는 단계.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익숙함"이란 단어는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훨씬 무겁고 깊은 정도이다. 하지만 겁을 주는 것은 필자의 의도가 전혀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후에 나누도록 하겠다.
두 번째는 내 악기에 이미 익숙해진 단계에서 나와 함께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단계이다. 실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번쯤은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과 연주하면 - 그 사람의 실력 여부를 떠나서 - 연주가 괜히 더 힘들고, 끝나고 나면 여느 때보다 더 피곤한 반면에 또 어떤 사람과는 내가 연주하기가 훨씬 편안하고 어떤 면에서는 자동으로 음악 전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말이다. 후자에 속하는 연주자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계.
세 번째는 두 번째까지 가능한 상태에서 연주하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여유가 생기는 단계이다. 전에 어떤 세계적인 드러머가 한손과 양 발로는 드럼을 연주하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건반을, 그리고 입으로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것이 그 경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예배하는 뮤지션들은 연주 외에 '딴 짓'할 수 있는 머릿속의 여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감사하고, 또 찬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세 번째까지 다 가능한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도 연주와 동시에 예배가 가능하여지는 단계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앞으로 각 단계마다 한 칼럼씩을 할애하며 설명 해 나갈 텐데, 이 네 번째 단계는 아마도 두 칼럼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네 가지 단계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예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에서야 비로소 가능해 지는데 대부분의 '세상'음악가들이 추구하는 성공은 놀랍게도 고작 첫 번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연주자들은 '세상'음악가들 보다 훨씬 더 높은 목표를 향해 간다는 것,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자부심 또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주자들,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 네 번째 단계를 향해 가야한다고 믿고, 또 그럴만한 능력 또한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 또한 그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있고,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사무엘상 15장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그 어떤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성경적인 '예배의 정의' 가 되겠지만 이를 우리의 논제를 향해 조금 더 발전시키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찬양토록 명령하셨고 이에 대한 순종 또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일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찬양이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이 필자가 이해하는 그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그렇다면,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긴 한 것인가?
그간 만나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해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결론은 '연주란 그것에 집중해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마치 유아반 선생님께서 맡은 일을 위해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찬양’하지 못하더라도 회중들의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순종을 통해 예배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사실 상당히 그럴듯했고, 실제 필자도 우리 교회- Brooklyn Tabernacle Church- 에서 연주자들과 몸을 부대끼기 이전까지 한동안 이 접근에 동의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찬양을 할 때 손을 들거나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거나 또는 박수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이제부턴 '찬양' 이란 단어에 이 의미를 함축하도록 하자)을 크게 방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찬양으로 깊이 들어가고 솔직해 지도록 돕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물론 드럼을 치는 것이나 피아노 건반을 적절히 누르는 것이 박수를 치거나 양 옆으로 움직이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행위들이지만 이론상으론 그런 연주들도 찬양에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문제는 피아노 건반을 적절히 누르고 드럼을 아름답게 두드리는 것이 우리가 박수를 치는 것처럼, 몸을 리듬에 맞게 움직이는 것처럼 “익숙하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부호(Quotation Mark)를 익숙하게라는 단어에 붙인 것은 여기 있는 저 네 글자는 사전적인 느낌의 단순한 정도보다 몇 만 배 더 깊고 무겁기 때문이다.
보지 않아도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말은 쉽지.." 분명히 그렇다. 말로 들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필자가 속해있는 교회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을 해 내는 것, 게다가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는가.
불과 네 문단 만에 엄청나게 먼 길을 온 듯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에, 다음에 이어질 칼럼의 서막을 본 교회에서 사역하며 느끼고 정리한 예배하는 뮤지션으로 가는 네 가지 단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며 열어보도록 하겠다.
먼저 네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단계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가 선택한 악기에 익숙해지는 단계.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익숙함"이란 단어는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훨씬 무겁고 깊은 정도이다. 하지만 겁을 주는 것은 필자의 의도가 전혀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후에 나누도록 하겠다.
두 번째는 내 악기에 이미 익숙해진 단계에서 나와 함께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단계이다. 실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번쯤은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과 연주하면 - 그 사람의 실력 여부를 떠나서 - 연주가 괜히 더 힘들고, 끝나고 나면 여느 때보다 더 피곤한 반면에 또 어떤 사람과는 내가 연주하기가 훨씬 편안하고 어떤 면에서는 자동으로 음악 전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말이다. 후자에 속하는 연주자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계.
세 번째는 두 번째까지 가능한 상태에서 연주하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여유가 생기는 단계이다. 전에 어떤 세계적인 드러머가 한손과 양 발로는 드럼을 연주하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건반을, 그리고 입으로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것이 그 경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예배하는 뮤지션들은 연주 외에 '딴 짓'할 수 있는 머릿속의 여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감사하고, 또 찬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세 번째까지 다 가능한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도 연주와 동시에 예배가 가능하여지는 단계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앞으로 각 단계마다 한 칼럼씩을 할애하며 설명 해 나갈 텐데, 이 네 번째 단계는 아마도 두 칼럼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네 가지 단계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예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에서야 비로소 가능해 지는데 대부분의 '세상'음악가들이 추구하는 성공은 놀랍게도 고작 첫 번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연주자들은 '세상'음악가들 보다 훨씬 더 높은 목표를 향해 간다는 것,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자부심 또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주자들,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 네 번째 단계를 향해 가야한다고 믿고, 또 그럴만한 능력 또한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 또한 그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있고,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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