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 교수의 강의에는 성경적 상담에 대한 그의 고민과 연구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교수답게 가장 기본적인 개념 정의에서 결론의 범주를 예시하고, 전문 상담 이론으로 사람들을 차근히 이해시킨 후, 성경 속에서 이를 재발견하는 방식으로 확신을 더해 주었다. 지난 9일부터 10일까지 양일간 시카고한인교회에서 열린 “상담의 기초 이론 및 실습” 상담세미나에는 매일 30명 가량의 목회자, 교회 제직, 소그룹 지도자들이 참석해 한 교수의 강의를 경청했다. 매일 6시간씩 진행된 강의 중간 식사 시간에는 참석자들끼리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각자 강의에서 깨달은 바와 은혜를 나누며 교제하기도 했다. 한 교수의 강의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부분 요약해 보도한다.

교회가 상담소가 되어야 한다

한 교수는 교회가 일상의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현대인들을 상담해 주는 상담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밖에까지 눈을 돌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돌봄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상담자였다. NIV 버전 성경에서는 이사야 9장 6절에서 그리스도를 기묘자, 모사로 지칭하며 Wonderful Counselor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한 교수는 “최근 자살한 연예인들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며 이 중에는 새벽기도까지 하던 사람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한 교수는 “이들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듯 했지만,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심각한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교회를 찾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그렇게 슬프게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을까? 그는 왜 신앙 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문제는 비단 일부 연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 성도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말하기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가 교회로 나타났다.

교회 안의 비난과 처벌이 두려움의 원인

한 교수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 사회의 규범을 지키려 하며, 그것을 어겼을 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그것을 숨기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창조 당시에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자유함이 있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인류는 자기 스스로 선악을 알게 되고 양심을 갖게 됐다”고 부연했다. 이 양심의 발현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 사회의 규범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때,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 가책을 억누른다. 이때부터 그 사람의 문제는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된다. 예를 들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가진 아들이 있다고 할 때, 그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큰 잘못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원래 생각을 억누르고 실제로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믿는다. 만약 자신이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것이 인정되고 밖으로 알려질 시 타인으로부터 올 비난과 처벌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그 죄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아버지를 미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정죄한다. 한 교수는 “지금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바로 무의식 속의 당신의 모습이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면, 당신의 무의식 속에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저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라며 간음한 자를 정죄하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는 자기 스스로 수도 없이 억누른 간음의 죄가 숨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간음은 나쁜 죄이며 나는 간음같은 짓을 안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로 억누른 정도가 클수록 그의 무의식 속에는 간음에 대한 욕구가 더욱 많이 숨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간음을 저지른 사람을 향해 비난함을 통해 ‘난 그런 사람이 아니지’라는 만족을 얻는 경향을 보인다.

한 교수는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을 모습을 보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군중들이 극도로 흥분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한 것은 왜일까? 그들의 무의식 안에 간음의 죄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희 중에 마음으로 간음 안한 자, 무의식 안에 그런 죄가 없는 자가 치라고 우리의 현 주소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간음죄의 잘잘못을 모르는 분이 아니셨다. 그것을 이미 넘어 계시기에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할 이유가 없었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은 그 문제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무의식 속으로 그것을 감추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향해 말씀이 들어 와도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받아 쳐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수십년 들어도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은 우리가 외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된 그 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조차 못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니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 눈물로 간구하신다는 구절이 바로 이 뜻”이라고 설명했다.

복음 강조하는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율법

교회에는 세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범이 많다. 세상에서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적지 않은 죄로 인정된다. 따라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일수록 편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이유는 위에 설명한 양심과 무의식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교회에서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이 정죄가 무섭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두운 면이 드러날 때 성도들로부터 받게 될 수많은 비난이 두렵기 때문에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문제를 교회에서 털어놓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털어놓거나 마음 속에 묻어 놓다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 교수는 “잘잘못을 말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비난과 정죄를 넘어, 죄의 문제까지 뛰어 넘어 자신처럼 되길 바라신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율법에 갇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드러내 함께 고민하려는 복음의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성도들이 변화되고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그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담이 무엇인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심리학을 오가며 한 교수가 상담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담과 유사한 것 중 하나가 자문이다. 자문은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식을 조언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법률, 의료, 진학 등의 문제에 있어 그 분야의 지식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해 주어 해결을 돕는 것이 자문이다. 그러나 상담은 지식적 문제가 아닌 사람의 감정적 부분과 인생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에 자문을 받을 수 없다. 인생의 문제에 통달한 전문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문이 아닌 상담을 받게 되는데 상담은 마음 속의 고민을 대화를 통해 해소하고 자기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약 성도가 찾아와 목회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했을 때 목회자가 “성경에 입각해 이렇게 저렇게 하시라”고 조언하면 이것은 상담이 아니라 신앙 자문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그 이야기를 들어 주며 그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는다면 이것은 상담이다. 한 교수에 따르면, 상담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고민하는 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이며 이 부정적 감정을 ‘화’라고 할 때, 이 화가 풀리고 나면 부정적 감정도 해소되고 인간 안에 있는 긍정적 생각이 발현돼 문제를 해결할 길을 스스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삭개오의 경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상담을 받은 삭개오는 스스로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한다. 한 교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하는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자문을 받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과 대비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잘잘못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잘잘못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숨기지 말고 털어놓게 하고 그것을 들어 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의 방법을 찾는다. 예를 들면,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정죄받았다 생각하고 입을 닫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싫어하는 그 감정을 계속 들어 주면 ‘화’가 풀리고 그 사람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간다. 한 교수는 “목회자를 비롯한 상담자들이 ‘내가 꼭 무엇인가 확실한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자체가 좋은 상담의 방법이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아무리 좋은 답을 가르쳐 주어도 인생의 문제만큼은 스스로 깨닫게 전에는 절대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 아닌가”라고 부연했다.

구체적 상담 기술- 잘 들어라

위에서 말한대로 상담은 듣는 것이다. 한 교수는 “우리는 한마디를 들으면 열마디를 하면서 해답을 주려 하는데 그래선 상담이 안된다. 어차피 인생의 문제는 답을 줄 수 없는 분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잘 듣는 것이 좋은 상담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냥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이 스스로 화를 푼다’는 원칙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의 두가지 방법, 사리담론과 심정담론을 이해해야 한다. 사리담론은 사리, 사실여부를 따지는 지식정보적 대화다. 심정담론은 감정의 여부, 내용을 따지는 감정적 대화다. 예를 들어 남편이 퇴근해 “나 내일 회사 안가”라고 했을 때 사리담론은 아내가 “당신이 회사 안가서 돈 안 벌어다 주면 우리 가족은 굶어 죽으라고?”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내의 말은 사리적으로 따질 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는 남편의 화가 더 부채질 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아내가 “오늘 회사에서 마음이 힘들었구나”라고 감정담론으로 들어가면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 생각한 남편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으며 화를 풀고 다음날 건강한 심리 상태로 출근한다. 한 교수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싸움은 감정담론으로 이야기 해야 할 것을 사리담론으로 받아치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상대방이 말하는 사실에서 그가 가진 마음의 상태를 추론하고 그와 공감하며 대화를 유도해 내는 것이 상담의 핵심이다.

한 교수는 삭개오의 비유를 다시 한번 들었다. 세리장으로서 경제적 지위와 부를 누리던 삭개오였지만 ‘왕따’의 문제는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나무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보시고 삭개오의 마음을 읽는 ‘심정담론’에 들어가신다.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친근함을 표현하신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친구로 생각한다는 구체적 표현이었다. 삭개오를 내려 오라 하신 후 그의 집에서 유하시겠다는 말씀은 모든 벽이 허물어진 일치의 단계다.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는 이유를 따지며 어떻게 살라고 자문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의 마음을 읽으신 것뿐인데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며 소유의 절반을 나눠주고 빼앗은 것은 네배로 갚겠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가장 위대한 상담의 모습이며 우리의 상담이 지향해야 할 궁극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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