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그토록 확실하게 보여 주었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도 어려울 것 같은 해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말에 따라 행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복된 열매가 이루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결과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일찍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 하는 것'(벧전4:13)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이미 가신 그 길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과 복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와 연결 시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복된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도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잘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잘 알았다는 것은 순종이 곧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삶은 온전히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됩니다. 영적 훈련은 십자가를 온전히 지는 삶이요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피고 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의 경우, 그의 십자가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육신적 자아로부터 왔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서 그는 자기 마음의 본질을 깨닫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그의 십자가가 세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경우는 사탄이 그의 십자가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탄은 욥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세상은 다니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육신이라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을 연구해 보면 당시의 종교 세력이 그들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나무 십자가를 그토록 많이 만들어 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루터의 십자가였고, 웨슬리의 십자가는 개신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위대한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예외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복되고 영광스런 열매에 동참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편하게 산비탈에 올라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기적만 바라고 현실 도피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 갈 것이다! 라는 핑계를 대고 일을 팽개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몸으로는 주님을 따랐지만 영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하기 싫은 현실의 십자가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십자가의 핑계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몸으로 예수님을 따라서 먼지투성이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고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골고다 언덕위의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감수해야할 고통이나 고난이나 어려움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이 남긴 모범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주께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한 위대한 승리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의 전적인 순종은 생명까지 갈멜산 제단위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위대한 승리의 영광에 동참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먼저 선결되어야 할 일이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로서, 성도가 성도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골고다 산 중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산 아래도 산 위도 아닌 중간 지점에 앉아서 편안하게 부활의 열매를 구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