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깔방은 55세의 생애를 마감하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그의 후계자 베즈(Theodore de Beze) 의 품 안에서 운명했다. 깔방의 임종을 지켜본 베즈는 그가 쓴 깔방의 전기에서“나는 깔방의 생애를 16년간이나 지켜보았다. 그는 더 이상 첨가할 수도 더 이상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라고 했다. 알려진 데로 그는 임종하면서 자신의 묘에는 어떤 비문이나 표식도 없이 평범하게 묻어달라는 요구대로 제네바시의 시립묘지 쁘랑 빨래 (Plainpalais)에 안장되었다.

세상의 군왕들이 권좌에 앉자 마자 자신들의 묘를 만들기 시작하여 후대에 길이 길이 남겨 두고자 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현상을 볼 수 있다. 깔방은 사람이 무슨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고 무덤에까지 업적을 새겨 두겠는가? 단지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 아닌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 이것이 깔방의 생애 목표이자 그 생애를 이끌어간 삶의 원칙이었다.

사실 인간 개혁자 깔방의 업적은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인 존 몰리 (John Moreley) 경은 “서양 사상사에서 깔방을 제외한다는 것은 마치 한눈을 감고 역사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할 만큼 서양사의 큰 비중을 차지함을 절감케 한다.

그 동안 깔방의 무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심심찮게 늘어나고 있었다. 필자는 몇 차례 제네바시내에 있는 공동묘지 쁘랑 빨래에 찾아갈 때마다. J.C라고 쓰여진 낡은 글자를 보곤 했다. 믿거나 말거나 묘지 관리인이 소개해준 깔방의 묘는 더욱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제네바를 방문하여 몇 사람의 동역자들과 함께 찾아갔을 때에는 깜짝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었다. 묘지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 판에는 E8 열 N707 Jean Calvin 이라는 친절한 안내가 되어 있었다. 묘의 위치는 변함없는 그곳 이지만 개혁자의 묘는 산뜻하게 단장까지 되어있었다.

마치 4인용 식탁 테이블 만한 크기의 묘는 사방으로 무릎 높이 만한 검정색 철책이 둘러 있었고 푸른 금잔디가 한결 개혁자의 묘를 감싸고 있었다. 물론 더 놀라운 일은 깔방의 묘에는 선명한 명패가 붙어 있었다.

John Calvin 1509.7.10 – 1564.5.27 그리고 세 줄로 개혁자를 간단한 영문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깔방의 묘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야 이 묘가 정말 개혁자 깔방의 묘일까? 요셉은 애굽을 떠날 때에 자신의 유골을 메고 떠나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

저명한 깔 방의 연구가인 두메르고에 의하면 묘에 기록된 J.C 라는 글자는 가짜 일뿐 관광업자들이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만든 가묘일 따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맨 처음 묘를 덮어놓은 석판 위에 J.C. 라는 표기를 했느냐가 궁금한 것이다.

그의 유언대로 묘비에 아무 업적도 새겨 두지 않았는가? 때문에 그의 묘를 기억하고 싶은 이들은 그 이름의 이니셜 J.C 만이라도 표기했을 것이며 아니면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만한 것이다.

아무튼 유럽 사람들의 섬세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인정한다면 다만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공원 관리 측에서 손질을 했을 것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한번 방문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공동 묘지 주변은 관광객도 없을뿐더러 관광에 필요한 엽서 한 장 판매하는 시설도 없는 곳이다.

오히려 현재 제네바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당시의 종교 개혁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제네바 시내에 위치한 제네바 공원을 의미 있게 다듬어 놓았다.

제네바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

제일 먼저 공원에 들어서면 15미터나 되는 종교개혁 기념비를 쉽게 볼 수 있으며 After the darkness, Light (암흑 이후, 빛) 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는 종교개혁가 4명의 인물상이 벽에 조각되어 있다.

▲제네바 공원에 조작된 종교개혁가 4명의 인물상 ⓒ이극범 목사
이 종교 개혁비는 쟝 깔방의 탄생(1509) 400주년과 제네바 학회의 창립(1559)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9과 1917년 사이에 설립되었다. 기념비 양쪽 끝을 측면으로 두 개의 넓은 받침돌이 있는데 기념비를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 루터(1483-1546)를 새겨 놓았고 기념비 우측에는 쯔빙글리 (1484-1531)를 새겼는데 이들은 독일과 스위스 교회 개혁의 개척자들이다.

현재 세계에서 장로교회가 가장 많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개혁정신을 이어 받은 개신교회 성도들은 한번쯤 찾아 가볼 만한 역사적이고 은혜가 넘치는 곳이라고 추천하고 싶은 종교 개혁의 현장이기도 한곳이다.

큰 글씨로 암흑, 이후 빛. 이라는 개혁의 주제를 새겨 놓은 아래에는 기욤 파렐 (Guilaume Farel.) 쟝 깔방 (Jean Calvin) 데오로드 드 베즈 (Theodore de Beze)와 존 녹스 (John Knox)의 모습들이 차례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네 개혁자들은 1559년 제네바 학회가 창립될 당시 모두 제네바에 있었으며 그들은 제네바시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표류할 때에 복음의 등불을 높이 들었던 개혁의 주역들이다. 그들의 흉상은 오늘날 제네바 까운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사제 복을 입고 있으며 그리스어로 (ΙΗΣ) 예수의 이름 세 글자가 주초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네 명의 종교개혁자들에 대하여 대략 요약해 보고자 한다.

-기욤 파렐 (Guilaume Farel -1498-1565)은 프랑스 갑(Gap)에서 출생 했으며 그는 1527년 시작된 스위스 종교개혁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제네바로 하여금 1536년 5월에 개혁 신앙을 인정하도록 이끌었고 그로 인해 깔방은 개혁운동을 확립하도록 제네바로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1538년 사망 시까지 뉴사델의 목사로 활동하였다.

-쟝 깔방 (Jean Calvin - 1509-1564)은 프랑스 노와용에서 출생 했으며 그의 손에든 성경이 그의 작업이 확실히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프랑스의 박해를 피하여 그의 첫 제네바 체류 (1536-1538)는 그가 추방당했을 때 실패로 끝났고 이후 스트라스부르그 로 가게 된다. 1541년에 다시 돌아와 사망하기까지 끊임없이 제네바 사람들과 유럽에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는데 전념한다.

-떼오도르 드 베즈(Theodore de Beze -1519-1605)는 프랑스 베즐리에서 출생했으며 1548년 종교 개혁으로 개종한 뒤 그는 로잔으로 이주해와 그리스어교사가 되었고 이후에 (1559년) 제네바로 이주하여 깔방을 도왔다. 그는 첫 제네바 학회장이 되었고 이 학회는 나중에 제네바대학교가 된다. 그는 깔방의 사망 이후에도 과업을 계속 진행시켜 나갔다.

-존 녹스(John Knox-1513-1572)는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으며 그는 변호사 교육을 받았으며 마리 튜더 (Mary Tudor)의 박해를 피해 맨 처음 독인 프랑크 프르트로 갔고 나중에 제네바의 영국인 망명교회에 합류하였다. 1559년 장로교회의 기초가 된 칼뱅의 작업에 기초한 예배식 문을 가지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는 그의 사망 이후 곧 개혁 신앙을 채택하였다.

종교개혁 기념비 좌측으로부터 양쪽에는 두 개의 역사적인 연대로 되어 있다. 이곳에 잠시 서서 조각들을 바라보면 당시 종교 개혁의 역사를 생생하게 더듬어 볼 수 있게 된다.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사건들과 인물들이 깔방의 좌우 편에 조각되어 있다.

맨 처음 좌편의 크게 새겨진 연대는 당시 공동의회에 모인 제네바 인들이 종교개혁의 칙령을 비준하고 공공의 의무 교육의 제정을 지정한 1536년과 오른쪽에 새겨진 1602년 12월12일에 제네바 인들이 사보이 공작의 공격을 물리치고 그들의 정치 독립을 확보한 날이다. 여기에 조각된 그림들을 자세히 보노라면 프랑스의 제독 가스파르 드 꼴리니 (1517-1572)의 인물상을 볼 수 있다.(그는 프랑스 귀족의 1/3 과 전국민의 1/10이 개혁신앙을 채택하게 된 1560년대 프랑스 개혁교회의 지도자임)계속해서 프랑스 나바르의 왕, 앙리 4세, 침묵 자로 알려진 윌리임 (1533-1584)의 인물상이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프러시아의 공작 프레드릭 윌리암(1620-1688)의 인물상과 로져 윌리암스(1604-1683) 그리고 청교도들과 같이 제네바에 깊은 연대를 했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의 인물상도 당당히 새겨져 있다. 그는 찰스 1세 처형 이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민관이 되어 공화 정부의 형태를 만들었고 유럽에서 종교 개혁운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 외에도 헝가리의 스테판 보스케이 (Stefan Bocskay 1556-606), 트랑실 바니아의 왕 인물상도 빼놓지 않은 것은 그는 깔방의 영향을 받아 스위스 다음으로 종교 개혁에 기여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판벽위에는 비엔나 평화 조약에서 나온 “종교예배의 자유로운 실행이 모두에게 보장된다.(Free exercise of religious worship is guarantee for all)라는 글귀와 보이스게이의 말로 이렇게 새겨졌다. “우리의 신앙의 독립과 우리의 양심의 자유, 우리의 예법은 금보다 귀하다.” (The independence of our faith, our freedom of conscience and our ancient laws are more precious to us than gold).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하는 많은 개신교인들이 깔방의 유적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파리에서 120Km떨어진 그의 생가 노와용(Noyon)을 방문한 뒤 시속 300Km를 달리는 TGB에 몸을 싣고 4시간 만에 스위스 제네바 시에 도착하면 곧 깔뱅의 묘와 제네바 공원에서 종교개혁의 숨결을 쉽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극범 목사

/이극범 목사(장신대학.틴데일신학-암스테르담.프랑스 선교사.파리장로교회 담임.KWMF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