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여섯 살짜리 큰애와 네 살 된 작은애는 한참 잘 놀다가 갑자기 한 아이가 울면서 금세 시끄러워진다. 조금 후에 가만히 보면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다시 서로 헤헤거리며 또 잘 어울려 논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한 아이가 안방으로 울면서 달려온다. 왜 서로 싸웠느냐고 물어보면 서로 먼저 하려다가 싸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도 내가 먼저 해야 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도 내가 먼저 가지고 놀아야 하고, 가정예배 때도 내가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이들의 생각이다. 잠잘 적에도 "왜 언니만 먼저 기도해 줘?" "왜 엄마는 만날 미혜만 먼저 기도하라고 해?" 한다.

매일 누가 먼저 했나 확실하게 기억하지 않으면 도대체 시끄러워서 언쟁이 멈출 날이 없다. 확실히 무엇이든지 잘해보려고 하고, 먼저 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일에 대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건강한 것이다. 만약 이런 모습이 없다면 나는 이 아이들이 학교가서 과연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염려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무엇인가 가르쳐야 할 것이 있음을 크리스천 부모된 자로서 분명히 느낀다.

지식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세상에서 혹은 또래 아이들에게 낙오되지 않도록 학원에도 보내고 개인 레슨도 시키며 지식의 습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아무리 잘 갈아진 칼도 잘 사용되어야 칼을 간 보람이 있듯이, 지식도 잘 사용되어야 국가에도 이웃에도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을 잘 사용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는 사물을 좀더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눈을 넓혀준다. 지식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문제의 파악은 빨라 지적은 잘하지만, 치료하거나 풀어주고 해결하는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지혜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함부로 살게 된다. 거룩한 자를 알고 자기를 알 때 곧 명철이 생긴다. 이런 지혜를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배울 수 있다. 세상에서는 먼저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요, 게임을 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이겨야 하고,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이 좋은 것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섬김으로 위대하게 되는 역설을 가르치셨다. 뿐만 아니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고 반복적으로 계속 말씀하시면서 그의 최후의 십자가 승리 사건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독특한 삶을 살도록 몸소 보여주셨다. 이는 곧 실패한 것 같지만 승리한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단은 온갖 지혜를 짜내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음을 맞게 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능력을 모른 채 미련하게 승리를 외쳤다. 그러나 이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고 많은 영혼들을 얻게 되는 수단이 되었고, 죽은 자가 살게 되는 부활의 능력의 사건이 되었다. 다시 말해 지는 자가 이기고, 잃는 자가 얻게 되고, 우리는 살기 위해서 죽으며, 얻기 위해 버리고, 보존하기 위해 내어주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는 역설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너무 남의 눈에 매여서 남을 의식하며 살지 않고, 그래서 군중의 방식을 따라가는 삶에서 용감하게 뛰어나올 수 있는, 한 단계 높이 올라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되도록 역설적으로 사는 지혜를 가르쳐야겠다.

한번은 장로님 한 분이 자기 아들들에게 "아버지 의견으로 그러지 말아라"하면 잘 안 먹히지만 "Because the Bible says so"하면 아무 말없이 자녀들이 순응한다고 하시며, 내 말 가지고는 애들은 못 키운다고 웃으셨다. 그렇다. 내 의견과 내 뜻으로는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가정에서 성경에 권위를 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부모님부터 생활화하여 보여줄 때, 아이들은 성경의 역설적인 삶을 배우며 믿음으로 자라날 수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는 또한 부모님부터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잠깐 거쳐가는 것으로 알아 본향을 찾는 마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가질 때 잠깐 지나치는 문화의 물결에 우링 아이들이 휩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화의 주류에서 떨어져나오는 주변인이 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이해시키며 연습시켜야겠다. 오늘도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양보하는 사람이 큰사람이야."
"누가 먼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진실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느냐가 중요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