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生涯(생애)에 있어서 결코 잊을수 없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이곳에서 1974-1976 까지 베를린 국립 음악원에서 修學<수학>(작곡) 했던 도시오, 이곳에서 結婚(결혼)을 했고, 그리스, 터-키 新婚旅行(신혼여행)시 召命(소명)을 받은 후 1976년 12월 이곳 베를린에서 미국으로 移住(이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윤이상 선생께 사사받기 위하여 Wannsee 에서 Kladow 까지 배타고 건넜던 곳을 제일 먼저 가게 되었다. 36년의 歲月(세월)이 走馬燈(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974년 유학당시 베를린은 베를린 장벽의 동.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戰勝國(전승국)<소련, 미국, 영국, 불란서>에 의하여
독일 全-國土(전-국토)와 首都(수도) 베를린은 네 나라가 分割(분할), 支配(지배)하게 되었다.

서울이 경기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베를린을 감싸고 있는 地域(지역)을 소련이 지배하였고, 수도 베를린을 똑같이 네 나라가 分割(분할) 管理(관리)하고 있었다.

소련 지배아래 살고 있는- 동독과 동 베를린에 살고 있던-주민들이 미국, 영국, 불란서가 관리하는 지역으로 13만 명 이상 移住(이주)하게 되었다.

住民 離脫(주민 이탈)의 危機感(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1961년 8월 障壁(장벽)을 設置(설치)하기 始作(시작)했고, 1989년 障壁(장벽)이 무너지기까지 무려 28년 동안 冷戰時代(냉전시대)의 象徵(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自由陣營<자유진영>(미. 영. 불이 관리하는) 베를린을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孤島(고도)의 섬이었다.

이전에는 배 타고 밖에는 갈수 없던 Wannsee 에서 Kladow 까지-이전의 동독 땅을-자동차로 尹伊桑(윤이상) 先生(선생)의 집((47 Sakrower Kirchweg, Kladow, Belin)을 옛 기억을 더듬어 가게 되었다.




베를린 市(시)와 윤이상 音樂財團(음악재단)에서 윤이상 博物館(박물관)을 꾸미기 위하여
改築.保守(개축. 보수)하고 있었다.

옛 시인 길재의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돌아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로되 人傑(인걸)은 간데없네 오호로 太平年月(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시가 떠올랐다.

유학당시 외로울 때면 자전거로 종종 산책했던- 1936년 히틀러가 세계 올림픽을 개최했을 당시 日帝治下(일제치하)의 손기정은 일장기. 마크의 러닝셔츠를 입고 마라톤에서 優勝(우승)했던- 올림피아 스타디움을 가 보았다. 마침 2009년 세계 육상대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통독이후 베를린 市(시)의 繁華街(번화가)는 地殼變動(지각변동)이 되어있었다. 유학당시 베를린 최고의 거리는 쿠담(Kurfusten Damm)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베를린 최고의 거리는 옛 동 베를린 지역이었던 브란덴브르 토어(Brandenburg Tor), 포츠담(Pots Damm), 후리드리히 스트라쎄(Friedrich strasse) 地域(지역)과 쏘니쎈터(Sony Center) 등으로 移動(이동)되어 있었다.

變化無雙(변화무쌍)한 時代(시대)의 狀況(상황)을 잘 살피는 자들은 物質(물질)의 富(부)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을 實感(실감)했고, 變(변)함없는 親舊(친구)들의 環甲旅行(환갑여행) 祝賀(축하)를 받으면서 마지막 旅程(여정)을 보내게 되었다.


▲(오른쪽부터)1791년에 세워진 포츠담 플라자, 브란덴브르 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