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음을 하소연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못 믿겠다고 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진정한 구도자들이 아니다. 물론 진정한 구도자들 가운데도 오랫동안 방황하면서 이 믿음을 찾으려 애쓰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대체적으로는 믿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불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된다. 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십 뉴스에 귀가 솔깃해 한다. 저질스러운 어둠의 이야기, 돈, 험담, 스포츠, 싸움 이야기, 여자, 남자 이야기 등등 온갖 세상 이야기는 너무나 쉽게 잘 들린다. 먼 길 가는 세 남자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시간 교대로 운전하였다. 내려오는 눈꺼풀은 황소의 힘으로라도 다시 끌어 올릴 수 없다고 이 사람들이 그만 졸다가 차선을 넘어 지그재그로 달려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 중에 한 명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주위에 아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자! 그래서 서로 아는 친구들의 뒷 담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종착까지 한번도 졸지 않고 기세 좋게 남을 씹으며 달려 왔다한다.

이상하게 남의 이야기하는 것은 귀에 쏙쏙 잘도 들어온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노력을 해도 잘 들려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세상 것들로 귀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온갖 세상의 법도와 또 문화와 풍습에 적응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먼저 배우고 그런 다음 여러 가지 계기로 인해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육신 중에 가장 나중까지 살아남는 기관은 귀이며 심지어 청력(聽力)은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반응 한다. 그만큼 듣는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입이 하나요 귀는 둘 인 것은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속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성경에 여러 번 말씀 하신 것이다. 여기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먼저는 육신의 귀 있는 자는 모두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귀 있는 자는 모두 다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자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귀는 영적인 귀를 의미한다. 육신의 귀를 가져 세상적인 것은 쏙쏙 잘 받아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듣지 못하는 자는 영적인 귀가 멀어서이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 바울이 성경을 강론을 오래하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행이 바울이 이 청년을 다시 살리기는 하였다. 이 단락에서 ‘깊이 졸더니’라 매우 의미 심장한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