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삶과 다윗의 고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행위에서 말미암지 않음을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할례의 문제를 다시 다룹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문제가 바로 할례를 받고 안 받음에 있고 참 이스라엘이 되는데 이 할례가 필수 요건이라면,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문제를 로마서 2장에서 다루었지만 그 만큼 중요하고 아주 민감한 문제라 확실히 해두기를 원해서 바울은 다시금 이 문제 끄집어내서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당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부모님이 둘 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할례는 유대나라의 상징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할례는 바로 천국 가는 Passport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롬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자 유대인들의 잘못된 할례관에 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시점에 대해서 논의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두 구절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장 때 아브라함은 85세였고 17장은 99세 때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14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롭다 함을 받는데 할례가 필요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요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보라! 할례의식이 제정되기 14년 전에 벌써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성경을 자세히 보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로움을 받는데 어떤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조는 이것입니다.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상징이지 그것이 어떤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으로 몸에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증표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고기를 살 때 어떤 것을 삽니까? 기름이 골고루 배어 있는 것? 색깔이 좋은 것?
좋은 것에는 꼭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USDA Choice마크가 있습니다. 근데 이 마크가 고기를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질 나쁜 고기가 이 마크 붙인다고 좋아 집니까? 이미 좋은 고기를 이 마크가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할례와 비슷한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식을 행했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마치 결혼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반지를 가진다고 해서 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혼인 당사자 간의 마음의 언약입니다. 내가 당신을 평생 사랑하고 동고동락하기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하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는 내적인 결합을 외적인 물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지키는 의식은 내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 합니다. 그것이 세례든, 성찬식이든 믿음으로 참예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지, 수단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 매일 물 뿌리면 됩니다. 매일 성찬식만 가지면 저는 매주 하기 힘든 설교 준비를 안해도 됩니다. 이것은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고 인정받았음을 보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롬 4:12)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 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바울은 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의로운 자다” 라고 아브라함이 유대인이 되기 14년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선언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도 믿음의 아버지이지만,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선행이나 종교의식을 통해서 용납 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의 수행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미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논증을 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브라함의 일례를 통하여 다시 확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이 돌 판에 새겨지기 전부터라도 여기 새겨진 항목을 어기면 범죄입니다. 다만 그전에는 정죄가 하나님께로 직접 왔는데 이제는 돌 판에 새겨진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세우신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서 그 범죄를 다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아브라함의 일례를 율법이 없이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일례로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율법도 시간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은 이후 430년 후에 나타난 것이기 대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의 의가 아니고 믿음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게 되거나, 아브라함이 유대인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이 천국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믿는 율법의 의로는 천국 가지 못하는 논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7)
자 오늘 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이슈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지금도 구원파라는 이단은 믿는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믿을 때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다 알았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지켰냐고 우리의 죄책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판 유대교입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누가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모든 규례들을 다 지키지 못하면 천국 가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면? 바로 아브라함의 삶을 보라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613가지 율법이 오늘날에는 그럴듯한 포장을 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면 지옥가고, 이것을 안 해도 지옥 간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자꾸 주지시킵니다. 우리의 죄의식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은혜로 천국 가는 것이지 무엇을 지킴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계속)
물론 같은 문제를 로마서 2장에서 다루었지만 그 만큼 중요하고 아주 민감한 문제라 확실히 해두기를 원해서 바울은 다시금 이 문제 끄집어내서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당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부모님이 둘 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할례는 유대나라의 상징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할례는 바로 천국 가는 Passport라고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롬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자 유대인들의 잘못된 할례관에 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시점에 대해서 논의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두 구절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장 때 아브라함은 85세였고 17장은 99세 때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14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롭다 함을 받는데 할례가 필요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요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보라! 할례의식이 제정되기 14년 전에 벌써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성경을 자세히 보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로움을 받는데 어떤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조는 이것입니다.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상징이지 그것이 어떤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으로 몸에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증표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고기를 살 때 어떤 것을 삽니까? 기름이 골고루 배어 있는 것? 색깔이 좋은 것?
좋은 것에는 꼭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USDA Choice마크가 있습니다. 근데 이 마크가 고기를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질 나쁜 고기가 이 마크 붙인다고 좋아 집니까? 이미 좋은 고기를 이 마크가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할례와 비슷한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식을 행했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마치 결혼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반지를 가진다고 해서 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혼인 당사자 간의 마음의 언약입니다. 내가 당신을 평생 사랑하고 동고동락하기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하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는 내적인 결합을 외적인 물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지키는 의식은 내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 합니다. 그것이 세례든, 성찬식이든 믿음으로 참예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지, 수단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 매일 물 뿌리면 됩니다. 매일 성찬식만 가지면 저는 매주 하기 힘든 설교 준비를 안해도 됩니다. 이것은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고 인정받았음을 보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롬 4:12)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 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바울은 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의로운 자다” 라고 아브라함이 유대인이 되기 14년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선언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도 믿음의 아버지이지만,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선행이나 종교의식을 통해서 용납 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의 수행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미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논증을 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브라함의 일례를 통하여 다시 확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이 돌 판에 새겨지기 전부터라도 여기 새겨진 항목을 어기면 범죄입니다. 다만 그전에는 정죄가 하나님께로 직접 왔는데 이제는 돌 판에 새겨진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세우신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세운 지도자에 의해서 그 범죄를 다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아브라함의 일례를 율법이 없이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일례로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율법도 시간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은 이후 430년 후에 나타난 것이기 대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의 의가 아니고 믿음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게 되거나, 아브라함이 유대인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이 천국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믿는 율법의 의로는 천국 가지 못하는 논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7)
자 오늘 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이슈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지금도 구원파라는 이단은 믿는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믿을 때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다 알았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지켰냐고 우리의 죄책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판 유대교입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누가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모든 규례들을 다 지키지 못하면 천국 가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면? 바로 아브라함의 삶을 보라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613가지 율법이 오늘날에는 그럴듯한 포장을 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면 지옥가고, 이것을 안 해도 지옥 간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자꾸 주지시킵니다. 우리의 죄의식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은혜로 천국 가는 것이지 무엇을 지킴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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