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쁨이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특히 질문을 많이 합니다. “지금 몇 시야?”(몇시인줄 알면 자기가 뭐 하려고 물어보는지) “찬수 뭐하니?”(자기가 엄마인가?) “이거 누가 그랬니?”(어디서 반말인지^^) “아빠 미워, 엄마 좋아!” “엄마 미워, 아빠 좋아!” 등등... 지난주에도 기쁨이의 말 한마디가 저를 기쁘게 해 주었답니다.

하나! 지난 주, Civic을 몰고 찬수와 지혜를 데리러 가는 도중, 뒤에 탄 기쁨이가 물어봅니다. 요즘 걸핏하면 “이거 누가 샀냐?”고 물어보는 기쁨이가 이번에는 “아빠, 이 차 누가 샀어?”라고 물어보더군요. “아빠가!”라고 대답해 주니, “저 차는 누가 샀어?”라고 물어봅니다. “저 차”란 Van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빠가!”라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멈췄습니다. 사실 Van을 살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도와준 손길은 한국에 있는 식구들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라, 이모들과 사촌들까지 목회를 하는 저를 도와주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았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기쁨이에게 “하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쁨이가 천진난만하게 “응, 하나님 고마워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그래 Civic도 그랬고, Van을 가지게 된 것도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를 샀던 당시에는 많이 기도했었는데, 어느덧 우리 가정의 ‘발’이 되어준 두 개의 차를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잊고 지냈던 것이 생각나, 운전을 하며 ‘평범한 복들’ 같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쁨이가 기특할 뿐입니다.

둘! 지난여름 한국을 다녀온 기쁨이가 한국말이 부쩍 늘어 왔습니다. 한국 가지전 까지는 세 살이 되었는데도, 문장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답니다. 그랬던 기쁨이가 이제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들을 문장으로 제대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합니다. 이 글을 쓰는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난 기쁨이가 “이젠 다 잤어”라고 하면서 또 눕더라고요. 그래서 “조금만 더 잘래?”라고 물었더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누우면서 “조금만 쉴래”라고 하더군요. 저는 “쉬”를 하겠다는 말인 줄 알고 “쉬 할래?”라고 물었더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으면서 “조금만 쉴게”라고 합니다. ‘지가 뭐가 피곤하다고 조금만 더 쉰다’고 하는지. ^^ 말 그대로 정말 조금만(2-3분) ‘쉰’ 기쁨이는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요즘은 기쁨이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제게 기쁨이 됩니다.

셋! 요즘 기쁨이는 쇼핑을 하든, 장을 보든 무엇인가를 사 달라는 통에 애를 먹습니다. 언니 오빠 school supply를 사러 가도, 하나를 챙겨오고, Lee를 장을 보러가도 제일 먼저 과자를 챙깁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Marshall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기쁨이 신발을 사러 간 것이지요. 자기도 엄마가 골라준 신발이 맘에 들었는지 좋아합니다. 그런데 인형 코너를 지나던 기쁨이가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제게 묻습니다. “이거 사줘!” 그래서 제가 “조이야, 하루에 하나! 하루에 하나만 사는 거야! 오늘은 신발 샀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답합니다. 기쁨이가 “다음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응 다음에”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그날 한국에서 한승수 집사님 가족과 오옥희 권사님이 왔습니다. 저는 저녁때 찬수와 지혜 클라리넷 레슨을 위해 다운타운으로 내려갔고, 제 아내와 기쁨이 그리고 한집사님 일행은 쇼핑을 갔습니다. Marshall을 간 모양입니다. 눈에 익은 곳에 들어온 기쁨이가 간 곳은 아침에 눈여겨 본 인형 앞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이거 내일 살까? 오늘 살까?” 자기 맘대로 이미 사는 것은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더군요. 아침에 저와 오늘은 그만 사기로 약속을 했는데, 상대가 엄마이니 또 물어본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한집사님 부인이 그 모습이 귀여워 결국 그 인형을 사준 모양입니다. 그렇게 그날 기쁨이는 원하는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넷! 두어 주 전, 아내와 조금 다툰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기쁨이가 보고 있었는데, 얼마 후 엄마와 단 둘이 있던 기쁨이가 물어보더랍니다. “엄마, 아빠 좋아 안 좋아?” “엄마, 아빠 미워 안 미워?” 아가인줄만 알았는데, 자기 눈에도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모습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다퉜던 기억도 모두 사라집니다. 또한 얼마 전 주일날 유아부 기도 시간에는 자기가 기도하겠다고 손을 들더랍니다. 그리고 혼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엄마가 피곤해요... 낫게 도와줘요... 울랄랄라 (국적 불명의 말도 종종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 엄마가 피곤해요... 낫게 도와줘요...” 이 기도를 대여섯 번 하면서, 끝을 내지 못하더랍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던 승우도 심각하게 눈을 감고, 길어지는 기쁨이의 기도를 끝까지 듣더랍니다. 정말 기쁨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게 기쁨이 됨을 고백합니다.

‘신앙적인 성숙 면에서는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지만, 그 성숙의 기초가 되는 마음에 있어서는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해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요구만 많은 나의 기도를 되돌아봅니다. 기도란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내 형편을 아뢰고, 내 처지를 털어놓고, 마음을 쏟아놓는 것인데... 나의 기도는 그동안 “달라” 혹은 “해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 왔던 것 같습니다. 기쁨이가 아빠와 엄마에게 와서 하는 ‘속없는’ 말 한마디조차도, 제 앞에 와서 “아빠 싫어 엄마 좋아!”라고 하는 말조차도 그 자체가 기쁨이 되건만, 나는 기도를 그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깨닫습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아빠의 손과 발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하게 만듭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무릎 꿇는 것 자체를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만큼 기도하게 됩니다. 더 많이 기도해야겠습니다. 더 많이 대화해야겠습니다. 더 많이 아버지께 말해야겠습니다. 내가 기쁨이의 말 한마디를 기뻐하듯, 하나님의 자녀인 내 말 한마디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에 우선순위에 두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