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어지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은 세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살 수 있는가? 열심히 일해서 상급으로, 규칙과 규례를 잘 지키고 인정받아 손익 계산에서 선이 악보다 많으면 그것으로 천국을 간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올바른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 된다고 하는 생각, 즉 라벨이 중요하다.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그 믿음으로입니다.

믿음+ a, b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입니다. 로마서(롬 3:28)에 요약되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으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되나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에 대한 일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면서 다시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과, 어떻게 내가 천국 갈 것을 확신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통해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자 아브라함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 모리아 산, 많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사실은 집안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아랍이나, 유대교나 모슬렘이나 사실은 다 일가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한 아버지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다 아브라함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 가족입니다. 서로 사촌간이고, 서로 골육간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서 세계 3대 종교가 나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림에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 거주하는 모든 사람과 마찬 가지로 다신론주의자였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유대인 전설에 의하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수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도 같은 환경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죄악에 물든 환경, 타락한 성품, 가장 최고의 선을 추구 하지 않았던 우리들의 삶. 그러기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구원 받음에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서 두 가지 단어에 주의 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의롭다 하심(Justified)이란 단어와 그것을 여기셨다(Credited)란 단어입니다.

의롭다 함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수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용납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됨을 의미 합니다. 야고보서(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가 아닌 친구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가 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의를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이것은 우리가 전혀 죄를 안 지은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율법도 어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보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왜 중요한가? 이래야만이 우리는 자긍심을 회복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존하고 수지는 어느 날 할머니 집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집은 전원에 있어서 멋진 동물 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특히 거위는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존은 오랜만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신나게 놀 수가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반면에 수지는 여자라서 할머니 곁에서 이것저것 심부름을 해야 돼서 속으론 심술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존은 먼저 고무줄로 새총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큰 Y자형 나뭇가지로 튼튼한 고무줄로 매어 제법 성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이것저것 표적을 삼아 마음대로 쏘고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다 심심해진 존은 살아 있는 동물들에게 이것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오리를 향해서 어떻게 하면 한번 쏴보나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으슥한 뒷마당 호숫가에 오리가 한가로이 유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냥 쏠 마음은 없이 새총에 돌멩이를 끼워서 겨냥만을 했습니다. 그런데 쏘는 것으로 착각을 한 수지가 이것을 보고는 소리를 빽 지릅니다.

그는 놀라서 그만 새총의 고물 줄을 당기고 말았습니다. 휙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돌멩이가 그만 공교롭게도 오리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춘 것입니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아신다면 어떻게 하나..존은 두려운 마음이 들기를 시작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수지는 또 어떡하나. 그 다음부터 할머니의 집에 머무르는 것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에게는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걸리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 합니다.

게다가 수지는 이것을 빌미로 마치 존을 하인 부리듯이 합니다. 이거 가져와라, 저거 해라, 존이 “싫어” 그러면 오리 흉내를 냅니다. 할머니에게 이르겠다는 것이지요. 참다못한 존은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기로 합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할머니에게 오리에 대해서 다 털어 놓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존아 나는 네가 오리를 쏘려고 할 때부터 다 보고 있었단다. 그때 이미 난 너를 다 용서 했단다. 다만 네가 나에게 정직하게 말해주기만을 가다린 것이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존은 이 고백으로 해서 이제 그동안 가졌던 부담감, 죄의식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수지는 짓궃게 또 와서 자기가 해야 할 힘든 일을 하라고 합니다. 존은 이제 가슴을 펴고 싫어 당당하게 말합니다.

수지는 오리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은 효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죄의식과 단절에서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한 단어는 여기다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Credited- 혹은 Reckoned Or Counted. 헬라어 원어는 이것을 마치 장부를 쓸 때의 개념으로 설명을 합니다. 즉 계산하다, 산출하다 - 하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산출하시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우리의 죄악의 값을 비교하사 그것이 Credited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Make Even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충족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됩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드려질 수가 있습니까?

그 예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람을 일례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바로 이 두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 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 어떻게를 아브라함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2절에서 만일이라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즉 만약에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우쭐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만약에 천국에서 이런 모습이라면?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선행을 자랑하고, 우쭐댄다면 말이죠? 그게 지금 세상과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말입니다. 바울의 논조는 이렇습니다. 만약에 구원을 선행으로 얻는다 하면 사람 앞에서는 으스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보다도 더 높아서 감히 측량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 결국 우리의 선행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드려 질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우쭐대어도 그는 우리의 감춰둔 어두운 마음의 방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인상 깊음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눈앞에 깊은 낭떠러지가 있고 그 낭떠러지 반대쪽에는 멋진 세상이 있는 모습을요.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밧줄은 앞에 있는 다른 세상으로 연결할 딱 1미터가 모자라는 밧줄이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생각다 못해서 그 모자라는 부문을 무명실로 엮습니다. 자 이제 이만하면 충분히 내 몸을 지탱 할 수 있을 거야 겨우 1미터 정도 모자라는데 뭘? 그러면서 건너 갈수 있을 까요? 1미터 아니 10센티만 모자라도 건너 갈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1센티 모자란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즉 믿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물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