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미국 펜실비니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독일 루터교회에 출석하는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고 성장하였다. 아펜젤러는 마샬대학을 거쳐, 드루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신학을 연구하는 중에 세계선교에 꿈을 가졌던 아펜젤러는 졸업을 하자 이어서 도지(E. J. Dodge)와 결혼을 하였다.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던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선교사 파송을 받고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아라빅 배에 승선하여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을 하였다. 이미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의 환영을 받고, 그의 집에 얼마동안 머물면서 조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하였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이수정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배웠기에, 아펜젤러는 그러한 상식을 터득하고 조선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요꼬하마에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던 언더우드(H. G. Underwood)를 만나 함께 조선에 갈 준비를 했다. 이수정이 이미 출간한 마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한 책을 한 아름씩 안고 조선으로 떠나는 제리호 배에 승선을 하였다. 이 배에는 일본주재 미국 회중교회 선교부의 테일러와 스쿠더도 함께 동승하였다. 원래 일행들은 부활절 아침에 도착하려고 하였지만 비가 오고 구름이 끼고 해서 속력을 제대로 내지를 못하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항에 닻을 내렸다. 서양식대로 아펜젤러 부인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아펜젤러, 언더우드 차례로 내렸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써 놓았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곧 서울에 안착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펜젤러 부부가 서울에 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조선 주재 미국 푸트 공사는, 이들을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불호텔에 2주간 머물게 하고 사태를 주시했다. 하지만 사태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다시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스크렌톤과 아펜젤러는 가족을 모두 일본에 나두고 둘 다 단신으로 1885년 5월 3일 조선 제물포에 도착을 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6월 8일 정동에 자리를 잡고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배제학당은 조선에 있어서 최초 근대교육의 효시가 됐다.
아펜젤러는 하루의 생활이 그렇게 바삐 지나갈 수 가 없었다. 1887년 10월에는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에 성서번역에 열심을 품고 일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모이는 성서변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에서 배가 충돌하고, 자신의 조사 조한규와 목포로 간 여학생이 함께 승선했는데 2명이 보이지 않자, 아펜젤러는 자신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갔지만 끝내 나오지 못하고 수장(水葬)을 만나게 됐다.
아펜젤러는 그가 늘 외치던 성경구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말을 실천하다가 간 선교사이다. 그의 추모비는 배재학당 동창들이 얼마 전에 양화진에 세웠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맥클레이 선교사는 이수정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배웠기에, 아펜젤러는 그러한 상식을 터득하고 조선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요꼬하마에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던 언더우드(H. G. Underwood)를 만나 함께 조선에 갈 준비를 했다. 이수정이 이미 출간한 마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한 책을 한 아름씩 안고 조선으로 떠나는 제리호 배에 승선을 하였다. 이 배에는 일본주재 미국 회중교회 선교부의 테일러와 스쿠더도 함께 동승하였다. 원래 일행들은 부활절 아침에 도착하려고 하였지만 비가 오고 구름이 끼고 해서 속력을 제대로 내지를 못하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항에 닻을 내렸다. 서양식대로 아펜젤러 부인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아펜젤러, 언더우드 차례로 내렸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써 놓았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곧 서울에 안착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펜젤러 부부가 서울에 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조선 주재 미국 푸트 공사는, 이들을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불호텔에 2주간 머물게 하고 사태를 주시했다. 하지만 사태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다시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스크렌톤과 아펜젤러는 가족을 모두 일본에 나두고 둘 다 단신으로 1885년 5월 3일 조선 제물포에 도착을 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6월 8일 정동에 자리를 잡고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배제학당은 조선에 있어서 최초 근대교육의 효시가 됐다.
아펜젤러는 하루의 생활이 그렇게 바삐 지나갈 수 가 없었다. 1887년 10월에는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에 성서번역에 열심을 품고 일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모이는 성서변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에서 배가 충돌하고, 자신의 조사 조한규와 목포로 간 여학생이 함께 승선했는데 2명이 보이지 않자, 아펜젤러는 자신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갔지만 끝내 나오지 못하고 수장(水葬)을 만나게 됐다.
아펜젤러는 그가 늘 외치던 성경구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말을 실천하다가 간 선교사이다. 그의 추모비는 배재학당 동창들이 얼마 전에 양화진에 세웠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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