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일이지만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받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입니다. 그러면 상처는 왜? 받게 되는 것일까요? 상처는 남다른 애착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애착을 버리면 상처도 없게 됩니다. 남자에게 얼굴이나 몸매가 못생겼다고 말하면 남자는 별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크게 애착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얼굴이나 몸매가 못생겼다고 말하면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여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남자보다 더 크게 애착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스스로 애착 갖는 부분을 멸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초연한 성도의 삶의 이유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저 역시 사역의 시간이 오래 되다보니 점점 나 자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점점 성화되어간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사역을 오래 하다 보면, 오해하는 사람, 시기심으로 공격하는 사람 등이 많아집니다. 이때에 내 자존심, 내 체면, 내 교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크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때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해서 나중에는 피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피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자기 스스로를 부인하고,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나쁜 상황이라고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론 대적의 공격조차도 나의 성숙과 나의 변화에 촉매 작용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항상 복음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일 수 있는가? 감탄이 나옵니다. 그러나 만약에 바울이 자기 의를 붙들고, 자기주장으로 서 있었다면, 과연 견딜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배경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의 사도 성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자기 부인이 없었다면, 그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공격조차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글 쓰는 사람의 대부분이 자신의 삶이 즐거워서기보다는 삶이 고통스러워서 글을 씁니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없는 가운데 나오는 글은 빈껍데기나 같습니다. 고통이 주는 영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글이 나오려면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고통이 축복이기 때문 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는 피하고 싶은 본문이 있습니다. 새벽시간 사도행전에 바울의 변명이 여러 번 계속 됩니다.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 사이트가 생겼습니다. 그때 했던 설교가 “받은 은혜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였습니다. 영감이 흘러넘쳐서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상황도 나쁜 상황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부딪히면, 가치 있는 열매들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Aug , 16, 2009 , 목양 실 에서 김 병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