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라톤에는 반환점이 있고, 축구에도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듯이 우리들도 각 자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저는 우리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을 모시고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올 해 우리 교회 표어(Slogan)도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합니다(We rejoice in our Lord always)”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과 모시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행복한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자유로운 것 같아도, 사실 인생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가 져야 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이나 죄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그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가 그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고, 그 죄의 결과가 고통과 죽음과 형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격적이고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식사하십니다(계3:20). 이민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하는 것은 늘 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 잠정적이나마 내린 결론이라면 많은 소유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어서 사람의 영혼을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에 목을 매지만 더 큰 사랑, 더 아름다운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몸부림도 비극으로 끝나는 이유는 받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부터 받겠다는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배반당하셨지만 복수심에 시달리거나 섭섭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이 별로 없음에도 삶의 소박한 일상들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따뜻한 미소와 말로 표현하며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도대체 이런 차이가 무엇때문에 생길까요? 교회안에도 불평이 습관화된 분들은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면들을 끄집어내어 문제를 삼습니다. 반면 자신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사랑해주심을 아는 겸손한 분들은 사자굴에 갇히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하나님을 보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욕망의 눈으로 현실만을 보며 살 것인가?’다시 한 번 결단합시다. 내 마음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