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쓴 소리를 잘못합니다. 그리고 쓴소리를 듣는 것도 참 어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상처를 쉽게 받기 때문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쓴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쓴 소리를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어려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쓴 소리가 약이 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 9문항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사람들에게 새로워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부분에서 새로워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의 그리고 거룩입니다. 가장 먼저 지식이 새로워진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퍽이나 흥미롭습니다. 바로 선지자적인 기능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적이 기능은 주로 말에서 옵니다.

말과 생각은 항상 이어지는데 말과 생각 가운데 하나님 중심 "사고의 틀"(thinking frame)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쓴소리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쓰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를 부인하는 것"이니까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쓴소리는 정의의 회복에 있어서 필요합니다. 정의(justice)는 하나의 기준을 말씀합니다. 정의가 어떤 특정 세력만을 위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이루어질 때 기준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위정자들은 민초(grassroots)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이며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의견을 잘 듣고 그 의견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맞는 범주에서 수렴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과정 가운데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도 필요한 것이 쓴소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쓴소리가 그 정도가 지나칠 때는 선(boundary)을 넘게 되고 질서가 무너집니다. 요즘 한국의 정세를 보면 이러한 쓴소리가 지켜야 할 선을 지나친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아무 쓴소리나 마구 마음에 내키는대로 하기에 요즘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듯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를 조심하라는 것은 이러한 쓴소리를 마구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동시에 단소리만을 남발하는 예언자들도 조심하라는 동시적인 경고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안전장치로 만들어 놓은 것이 "거룩의 회복"입니다. 거룩은 영어로 godliness 단어 뜻대로 한다면 "하나님 같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사고에서 하나님 같이 부드럽고 온유함을 유지하고 평정을 잃지 않은 가운데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쓴소리가 사랑과 온유 가운데 전달될 때 그 아름다움의 파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입니다.

쓴소리가 그립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온유 가운데 행해지는 쓴소리!
이 시대를 향해 그러한 쓴소리를 던질 선지자가 그립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킬 하나님 닮은 선지자!
그리고 그를 통한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쓴소리가 그립습니다.

우리는 목사로서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한 교회로서 과연 그런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