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가에는 최초 불어 번역 성경과 최초 기독교 강요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 소르본느 대학에서 빌려가므로 방문자들이 볼 수 없는 날이 있다. 불어 성경은 칼뱅의 사촌인 올리베땅(Oliétan)이 히브리어와 그리이스어 본을 참조하여 1535년 뉴샤델에서 번역되었고 칼뱅이 서문을 기록하여 인쇄되었다.

칼뱅은 얼마동안 파리의 근교 남쪽 오를레앙(Orleans)과 앙굴렘(Angouleme)등에 숨어 있으면서 그는 '기독교강요'라는 중요한 신학 조직론 저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와 1세 앞으로 드리는 글이었다. 칼뱅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먼저 이해해야만 하는 책이다. 교리적 도덕적인 보고서, 예배에 대한 논문들, 그의 성서 주석, 신앙고백, 심지어는 서안문 가지도 이 책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완벽한 논리 정연한 이론으로 저술된 '기독교강요'는 복음주의적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은 1536년 칼뱅의 생전에 27판이 발행되는데, 그 중 10판이 라틴어로, 17판이 불어로 발행되었다.

칼뱅의 생가는 3층집으로서 각 층마다 잘 정리되어 있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1층은 개혁자 칼뱅이 태어난 방으로서, 기독교 강요 원본이 소장되어 있고, 2층에는 올리비에땅이 번역한 불란서 성경번역본, 3층에는 칼뱅이 생각했던 원형의 교회 건물 모델이 준비되어 있다.

그는 제네바로 망명한 이후 신교도들에게 생명과 신앙을 불어넣었다. 이 세상의 어떤 교황보다도, 그리고 교회의 권위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그의 정신이 박물관에 그대로 존재한다.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칼뱅에게는 하나의 폭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교회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복종하겠다는 것과 성경 말씀에 의해서 증명된 유일한 진리에만 복종하겠다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다. 쟝 칼뱅은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 아래 있고, 성경의 위에나 성경과 동등하지도 않았다고 믿었고 '오직 성경으로 만(Sola Scripture)'을 외쳤다.

쟝 칼뱅의 아버지 제라드 꼬뱅(Gerard Cauvin)은 정력적이고 일을 좋아했다. 이 지방의 중요한 귀족과 같은 위치에 이르렀으며 지방의원이며 공증인이고 교회 참사회의의 재정가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불란서 최고의 미모를 지닌 사람 중 하나라고 전해지는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다. 샤를르(Charles), 쟝 칼뱅(Jean), 앙뚜완느(Antoine)와 어려서 죽은 프랑스와(Francois), 그리고 두 딸이다. 두 딸 중 하나는 노와용에서 결혼했고, 다른 딸 마리(Marie)는 오빠를 따라 제네바로 갔다.

쟝 칼뱅이 10살이 되기도 전에 그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쟝 칼뱅은 노와용 성당의 남쪽 바깥문에 위치한 작은 성당의 사제가 되며 그는 머리를 둥글게 깎고 성직 록을 받기 시작한다. 후에 뽕레벸크 사제라는 품위가 그에게 주어진다. 1523년 노와용에 있는 카펫트 학교(College de Capettes)에서 수업을 받은 후 쟝 칼뱅은 그의 몇몇 친구들과 함께 파리로 떠난다.

한편 의견차이로 인해 노와용 참사회원들과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간다. 게다가 1526년에 모호한 유산 사건을 보고하는 것을 거부한 탓으로 다른 참사 의원들이 주교의 허가를 얻어 칼뱅의 아버지인 제라드를 징계하고 파문시킨다. 아버지의 사건은 쟝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동안 쟝은 일종의 학생 감옥인 몽떼뉴 학교(Montaign)로 강제로 옮겨져 아침 4시부터 저녁 8, 9시 잠들기 전까지 고된 신앙훈련과 철학, 신학강좌, 혹독한 시험, 그리고 추상적인 대담 등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쟝 칼뱅은 4년동안 이 학교 제도를 겪으면서 정신과 육체의 엄격한 훈련에 지쳤고 건강에도 많은 해를 입었다. 제라드가 더 이상 그의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때 쯤이었으며, 총명한 지식인 쟝은 과거의 박식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라틴어 이름을 쓰게 된다. 칼비니스 곧 칼뱅(Calvin)이 곧 그의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권력과 부귀를 지닌 성직자들의 권력 난동을 반대할 수 있는 법관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쟝은 다시 노와용을 떠나 중부도시인 오를레앙 대학으로 떠난다. 그 다음에 부르쥬, 이어서 파리로 간다. 그는 결코 지칠 줄 모르는 의욕을 가지고 당시 유명한 스승들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고향 노와용으로 다시 돌아와서 신부가 된 형 샤를르와 함께 임종을 지켜봤고, 그는 교회의 묘지에 아버지를 묻히게 하기 위하여 힘들고도 굴욕적인 조건 속에서 투쟁하게 된다.

현재 노와용 시에는 개신교인이 한 사람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인 신학자의 아내인 마담 드로떼 카잘리(Drottee Casalis)가 개신교인으로서 칼뱅의 생가를 관리하며 드문드문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고 이 집의 역사를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나 1993년 12월에 그녀는 은퇴하고 파리로 돌아와 버렸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 개신교인이 아닌 노와용 시청에서 문화제 보존을 목적으로 이 집을 관리하기 때문에 칼방의 생생한 역사를 듣기에 어려울 것"이라며 섭섭해했다. 그의 말대로 노와용 시청 소속인 문화부 직원인 프레드릭 파니(Fredric Panni)는 칼뱅의 생가 책임자인데, 자신은 개신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집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모르고 있다고 필자에게 전했다.

그러나 지난 1983년 개축된 이후 쉬지 않고 칼뱅의 후예들이 이 집을 방문하고 있다. 94년 '빛과 소금'과 '기독교 신문'에 칼뱅의 생가가 소개된 이후 현재 500여명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방문한 바 있다. 파리를 방문하는 개신교인들도 쉽게 노와용을 방문할 수 있다. 쟝 칼뱅이 태어난 생가와 중, 고등학교까지 성실하게 신앙생활했던 노와용 노틀담과 그가 개혁자로서 기도하며 인문주의를 받아들이며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고 자랐던 아름다운 농촌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가 주소 : Musee Calvin et Societe des Amis du Musee Calvin
6, place aristide Briand 60400 NOYON FRANCE
Tel. 33-3 4444 0359
연락처 : 이극범 목사 Lee Geuk-Bum (Tel. 33-1 4898 4443)
2 Place Jean Giroudoux 94000 CRETEIL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