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치 않음이 하나님을 향한 죄라면 불의는 사람을 향한 죄입니다. 본문 19-23은 경건치 않은 삶의 모습이고, 24-32은 불의한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음이 죄의 뿌리라면 불의는 바로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그러면 본격적으로 재판을 진행해 봅시다.

II.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진노를 받는 이유는

불경건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치 않음이 무엇이라고요? 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삶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주셨다는 것이 증거라고 말합니다.(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증거는 그냥 묵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사람들은 자연에 나아오면 이런 말들을 자주 합니다. "여기 나와 보니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과 되어질 수 없는 증거입니다. 즉 꼭 봐야 되는데 못 본 것을 아차 실수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이 우주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있거나, 유럽에 있거나, 세계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가 보는 별, 그들도 봅니다.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문명인이건 비 문명인이건 간에 모든 우주의 편만한 창조물이 하나님이 존재하심의 증거는 누구나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어떠하신 것을 말해 주고 있는가요? 20절 보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태양계를 보십시오. 이것이 우연히 디자인이 된 것입니까? 다자이너가 없이 디자인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우연히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시계를 가지고 분해를 한 다음에 비닐봉지에 넣어서 마구 흔들어서 시계가 조립되어 나온다. 이것을 믿을 사람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주가 커다란 폭발로 인해서 이러한 체계적인 태양계가 존재 한다는 것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디자인 했고 그 아이디어는 창조 전에 벌써 존재 했다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현해내신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 십니다. 누가 있어 별을 만들고 그것을 운행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상상 못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한 20절에 이것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졌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보여 졌나요? 네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조직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14:33) 물론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나 거룩하심이나 인격적인 면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나 영원하심이나 능력은 우리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핑계치 못한다고 선언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할 때나 아니면 초신자 일 때 하는 질문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아니면 꼭 이런 질문 하지요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나요? 본문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 받는 것은 복음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핑계치 못하는 것입니다. 1962년 mercury-atlas 6호를 타고 최초로 우주궤도를 돌고 온 John Glenn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어디든 다 계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봤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있었으며, 하나님과 가까이 있음을 느꼈고 그분의 위엄을 보았습니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일주일 먼저 우주 궤도를 돌았던 소련 우주비행사는 “나는 하나님이 과연 계신 가? 이리저리 다 찾아보았지만 볼 수가 없었노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치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누가 옳게 본 것입니까? 인류 문화를 보더라도 어떠한 문명도 무신론 문명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종교가 왜곡되고 진리에서 떨어져 있지만 그 어떤 문명도 신전 없는 문명은 없었습니다. 그 어떤 문명도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고 예배하지 않았던 문명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다만 불신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다만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놈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패륜아에 불과 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에게 보임이라 그러므로 핑계치 못할 지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정죄 받는 이유는 첫째로는 그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 여기서 katecw 막는 이라는 단어는 마치 도사견이 입으로 먹이를 덥석 물고 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진리를 붙잡고 물고 늘어져서 무시해 버리고 제한하고, 기억에서 묻어버립니다. 실제적 일을 사람들은 은폐하고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묻어져버립니까? 실존은 감출 수는 있어도 결코 완전히 묻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점점 정직을 상실해 갑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억압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여러분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단지 이론에 불과 합니다. 증명할 수 없는 면에서는 창조론이나 진화론 마찬가지니까요. 아무도 그 시작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결국은 둘 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진화론자가 되든지, 믿음으로 창조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진리를 막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덮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공립학교를 보십시오. 저들은 크리스마스를 지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도 지키고 크리스마스 노래도도 부릅니다. 단 예수라는 이름이 없는 캐롤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막는 하나의 예입니다. 어떤 부인이 쇼핑몰 안에 만들어진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보고 불평을 합니다. "아이고 또 크리스천들이 날뛰고 있구만, 제네 들은 왜 우리 Holiday에 꼭 저렇게 나타나서 딴지를 거는 거야 기분 잡치게"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억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