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1년 9·11테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를 확증해 준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교 단체 간 대결, 신학적 대결, 영적 현상 및 회심 대결 등에서 양 종교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테러와 대 테러 전, 종교 박해와 같은 형태로도 대결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일보에서는 김덕래, 초미성 선교사의 글을 통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무슬림은 우리의 형제?- 이스마엘의 후예 무슬림
지난 3월 뉴욕에서 이슬람 퍼스펙티브 코스의 한 과정으로 당시 수강생 중 60여명과 맨하탄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를 방문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예배 모습을 지켜 보고 그들의 지도자인 이맘(편집자 주: 예배를 인도하는 자. 무슬림은 하루 5번 예배를 드린다. 예배드릴 때마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를 가르킨다.)과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과 크리스천은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라고 하며 말문을 열었다.
과연 그가 말하는 형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002년 9월 27일 CBS 뉴스의 Jim Reed는 그의 기사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은 평화를 누려야한다.(All the children of Abraham deserve peace.)”라고 하였다.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일컫는다.
무슬림들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처럼 자신의 뿌리를 아브라함에 두고 있다. 꾸란이나 구약 모두 아브라함, 그의 아내 사라, 여종 하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으로 말하나 무슬림은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의 사이에 생긴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말한다.
도대체 이 아브라함이 누구이길래 모두 그의 자손이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의 종말을 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 가능케 한 인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순종의 아브라함이었으나 인내심이 약한 인간의 속성으로 아내 사라가 아닌 여종 하갈에게서 후사를 보고자 하였다. 하갈에게서 난 자가 바로 이스마엘이고 그는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나기전까지 장자로써의 모든 사랑을 누렸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후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쫓겨 났으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구약과 꾸란 모두 이 두 모자가 거의 죽을 뻔 하였으나 사막에서 우물(Zamzam)을 발견하는 기적으로 구사일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이 사건은 이슬람의 두 가지의 가장 큰 상징의 유래가 되고 있다. 이슬람 자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죽지 않고 현재의 메카 근처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갈이 기적적으로 사막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성전으로 아담이 지었다고 믿고 있는 지금의 메카에 있는 카바를 아들 이스마엘과 재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모든 무슬림들은 지금까지 카바가 있는 쪽을 향해 기도 하게 된 것이다. 카바는 무슬림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카바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무슬림 경전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메카로 향한 거룩한 성지순례 의식들을 확립하였는데 그 중 여러가지가 하갈의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성지 순례 때 알라가 주셨다는 ZamZam 우물 근처의 Safa와 Marwah 언덕 사이를 물을 찾아 헤메듯 7번씩 뛰어 다니는 의식을 꾸란에서는 Sayi라 한다. 이는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위해 물을 찾아 헤맨 고통을 기념키 위함이다. 처음 Safa언덕을 오를 때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언덕 위에서 카바를 보며 알라의 이스마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하갈의 고통 속에서 위로하며 축복된 자손의 약속을 이루시는 알라의 자비를 깨닫게 한다.
이슬람에서는 창22:1-2의 모리야산에서의 이삭 번제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 번제하려고 했던 아들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의식으로 가축을 도살하여 제물로 드리는데 이를 Eid-al-Adha라고 한다. 장자로서의 축복권을 부각시키며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축복이 이스마엘에게 있음을 무슬림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형제 이스마엘
Don McCurry(예수전도단 미니스트리 투 무슬림(MINISTRIES TO MUSLIMS) 사역 대표)는 그의 저서 'Healing the broken family'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극은 아브라함의 깨진 가족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처를 외면치 않으셨다. 비록 인간의 실수로 태어난 이스마엘이었으나 그를 위한 축복을 약속하셨다.(창17:20)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인 '이스마엘', 그의 후예 무슬림들의 외침과 눈물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신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녘, “알라는 한 분이시며 무하멭은 그의 메신저다..”Shahada(신앙 고백)를 고백하며 울려 퍼지는 Azan(예배의 초청)소리에 엎드릴 때 마다 그의 영은 절규한다. “알라여 내 기도의 수고를 보시고 마지막 날 나를 구원하소서!”
그 모스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죽은 성자의 무덤 앞에서 이스마엘의 딸이 울고 있다. 죽은자의 무덤을 손으로 치며, 얼굴을 치고, 가슴을 치는 미신적 행위를 통해 모든 복이 찾아 올 것을 간구하고 있다. “알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수피즘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깊은 산 속에서는 수피들이(이슬람 신비주의자) 둥그렇게 모여 온 몸을 앞 뒤로 흔들며 “알라 후아”를 외친다. 이십만번을 외치다 기절하여 쓰러질 때 알라를 만나는 입신을 체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라를 만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 쓰러질 수 있는 그들의 처절한 외침.
팔레스타인 한 마을에선, 마지막 남은 자식마저 폭탄에 잃어 버린 이스마엘의 자녀들이 넋을 잃고 허공을 보고 있다. 이젠 자식도, 농사를 지을 땅도 집도 없다. 끝없는 죽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눈믈, 고통…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여기 저기 떠도는 그들의 신음을 듣는다. 가난과 폭력과 기아에 쩌든 그의 후예들은 이제 외칠 힘조차 없는지 모른다. “알라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의 눈물을, 외침을 듣고 계십니까?”
세대를 거쳐 일어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피흘림속에 지친 이스마엘의 후예들은 지금도 진정한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의 초청을 통해 “내가 그를 반드시 축복하리라(창17:19,20)”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질시와 억울함이 쌓여 거칠고 무자비함이 난무하는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본다. 잃어버린 그 사랑을 찾아 하염없이 흐르는 그들의 눈물을 닦을 자가 절실하다. 나의 형제 이스마엘 너를 사랑한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일보에서는 김덕래, 초미성 선교사의 글을 통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초미성, 김덕래 선교사(왼쪽부터) | |
지난 3월 뉴욕에서 이슬람 퍼스펙티브 코스의 한 과정으로 당시 수강생 중 60여명과 맨하탄에 있는 가장 큰 모스크를 방문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예배 모습을 지켜 보고 그들의 지도자인 이맘(편집자 주: 예배를 인도하는 자. 무슬림은 하루 5번 예배를 드린다. 예배드릴 때마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를 가르킨다.)과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과 크리스천은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라고 하며 말문을 열었다.
과연 그가 말하는 형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002년 9월 27일 CBS 뉴스의 Jim Reed는 그의 기사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은 평화를 누려야한다.(All the children of Abraham deserve peace.)”라고 하였다.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일컫는다.
무슬림들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처럼 자신의 뿌리를 아브라함에 두고 있다. 꾸란이나 구약 모두 아브라함, 그의 아내 사라, 여종 하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으로 말하나 무슬림은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의 사이에 생긴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말한다.
도대체 이 아브라함이 누구이길래 모두 그의 자손이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의 종말을 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 가능케 한 인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순종의 아브라함이었으나 인내심이 약한 인간의 속성으로 아내 사라가 아닌 여종 하갈에게서 후사를 보고자 하였다. 하갈에게서 난 자가 바로 이스마엘이고 그는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나기전까지 장자로써의 모든 사랑을 누렸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후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쫓겨 났으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구약과 꾸란 모두 이 두 모자가 거의 죽을 뻔 하였으나 사막에서 우물(Zamzam)을 발견하는 기적으로 구사일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이 사건은 이슬람의 두 가지의 가장 큰 상징의 유래가 되고 있다. 이슬람 자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죽지 않고 현재의 메카 근처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갈이 기적적으로 사막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성전으로 아담이 지었다고 믿고 있는 지금의 메카에 있는 카바를 아들 이스마엘과 재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모든 무슬림들은 지금까지 카바가 있는 쪽을 향해 기도 하게 된 것이다. 카바는 무슬림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카바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무슬림 경전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메카로 향한 거룩한 성지순례 의식들을 확립하였는데 그 중 여러가지가 하갈의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성지 순례 때 알라가 주셨다는 ZamZam 우물 근처의 Safa와 Marwah 언덕 사이를 물을 찾아 헤메듯 7번씩 뛰어 다니는 의식을 꾸란에서는 Sayi라 한다. 이는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위해 물을 찾아 헤맨 고통을 기념키 위함이다. 처음 Safa언덕을 오를 때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언덕 위에서 카바를 보며 알라의 이스마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하갈의 고통 속에서 위로하며 축복된 자손의 약속을 이루시는 알라의 자비를 깨닫게 한다.
이슬람에서는 창22:1-2의 모리야산에서의 이삭 번제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 번제하려고 했던 아들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의식으로 가축을 도살하여 제물로 드리는데 이를 Eid-al-Adha라고 한다. 장자로서의 축복권을 부각시키며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축복이 이스마엘에게 있음을 무슬림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형제 이스마엘
Don McCurry(예수전도단 미니스트리 투 무슬림(MINISTRIES TO MUSLIMS) 사역 대표)는 그의 저서 'Healing the broken family'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극은 아브라함의 깨진 가족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처를 외면치 않으셨다. 비록 인간의 실수로 태어난 이스마엘이었으나 그를 위한 축복을 약속하셨다.(창17:20)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인 '이스마엘', 그의 후예 무슬림들의 외침과 눈물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신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녘, “알라는 한 분이시며 무하멭은 그의 메신저다..”Shahada(신앙 고백)를 고백하며 울려 퍼지는 Azan(예배의 초청)소리에 엎드릴 때 마다 그의 영은 절규한다. “알라여 내 기도의 수고를 보시고 마지막 날 나를 구원하소서!”
그 모스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죽은 성자의 무덤 앞에서 이스마엘의 딸이 울고 있다. 죽은자의 무덤을 손으로 치며, 얼굴을 치고, 가슴을 치는 미신적 행위를 통해 모든 복이 찾아 올 것을 간구하고 있다. “알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수피즘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깊은 산 속에서는 수피들이(이슬람 신비주의자) 둥그렇게 모여 온 몸을 앞 뒤로 흔들며 “알라 후아”를 외친다. 이십만번을 외치다 기절하여 쓰러질 때 알라를 만나는 입신을 체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라를 만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 쓰러질 수 있는 그들의 처절한 외침.
팔레스타인 한 마을에선, 마지막 남은 자식마저 폭탄에 잃어 버린 이스마엘의 자녀들이 넋을 잃고 허공을 보고 있다. 이젠 자식도, 농사를 지을 땅도 집도 없다. 끝없는 죽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눈믈, 고통…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여기 저기 떠도는 그들의 신음을 듣는다. 가난과 폭력과 기아에 쩌든 그의 후예들은 이제 외칠 힘조차 없는지 모른다. “알라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의 눈물을, 외침을 듣고 계십니까?”
세대를 거쳐 일어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피흘림속에 지친 이스마엘의 후예들은 지금도 진정한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의 초청을 통해 “내가 그를 반드시 축복하리라(창17:19,20)”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질시와 억울함이 쌓여 거칠고 무자비함이 난무하는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본다. 잃어버린 그 사랑을 찾아 하염없이 흐르는 그들의 눈물을 닦을 자가 절실하다. 나의 형제 이스마엘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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