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출신의 개혁자 쟝 칼뱅(John Calvin)의 생가에 세워진 Calvin의 박물관은 1983년에서야 그의 고향인 노와용(Noyon) 시와 프랑스 문화성의 도움으로 개축되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었던 16세기 중반에 칼뱅은 프랑스 정부와 카톨릭으로부터 추방을 받은 뒤 430년만에 그것도 관광 차원에서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쟝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출신이며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에서 북쪽 120Km 지점인 노와용(Noyon)이라는 아름다운 농촌이다(1509.7.10). 그리고 1564년 5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프랑스는 개혁교회(장로교회)가 제네바에서 탄생한 전후, 많은 순교의 피가 뿌려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7만 여명의 희생자들이 위그노 전쟁 때에 정부군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파리에서만 8천여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위그노 전쟁의 희생자들은 모두 쟝 칼뱅의 사상을 받아들인 개신교인들이었다.
프랑스 출신 칼뱅은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인물로 불리고 있다. 루터가 교회개혁의 선구자라면 칼뱅은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발전시킨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다.
그러나 위대한 개혁자 쟝 칼뱅을 알고 있는 프랑스인은 별로 없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한다.
칼뱅의 생가는 노와용시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도시에 높은 정신적인 지주이자 카폐 왕조의 왕립지였고,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행했던 높이 치솟는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칼뱅의 생가는 16세기말 카톨릭 교도 연맹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7세기에 조그만 마당을 가진 가옥이 신축되었는데 판화와 사진, 그림들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1차 대전까지는 노와용 시청에 소속이 되어있었으며, 1914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이 집에 '개혁자의 생가'라는 역사적인 장소로 표지판이 붙여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본래의 생가의 모습이 또 한 차례 파손이 되고, 1954년에 다시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 현대식 설비를 갖추게 되었고,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 박물관은 불란서 개신교회의 교회사 회와 노와용 시의 공동 위원회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으며 칼뱅 박물관 후원회가 결성되어 이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대로 프랑스는 종교 개혁에 실패한 카톨릭 국가다. 종교개혁은 실패했지만 위대한 개혁자 칼뱅을 배출한 훌륭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칼뱅이 당시 인문주의를 받아들이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때는 1533년 11월 1일 파리의 꼬르델리에(Cordeliers) 교회에서 소르본느 대학 총장인 니콜라 콥(Nicolars Cop)의 개학식 연설문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니콜라 콥 총장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제로 연설을 했으며, 교황 법령에 의해 명령된 인간의 작품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복음에 나타난 순수한 은총을 통한 구원을 알렸다. 이것은 프랑스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니콜라 콥은 도망가야만 했다. 이 연설문을 작성했던지 최소한 이 강연에 영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정죄를 받은 칼뱅의 망명 생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계속>
생가 주소 : Musee Calvin et Societe des Amis du Musee Calvin
6, place aristide Briand 60400 NOYON FRANCE
Tel. 33-3 4444 0359
우리 개신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쟝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출신이며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에서 북쪽 120Km 지점인 노와용(Noyon)이라는 아름다운 농촌이다(1509.7.10). 그리고 1564년 5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프랑스는 개혁교회(장로교회)가 제네바에서 탄생한 전후, 많은 순교의 피가 뿌려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7만 여명의 희생자들이 위그노 전쟁 때에 정부군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파리에서만 8천여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위그노 전쟁의 희생자들은 모두 쟝 칼뱅의 사상을 받아들인 개신교인들이었다.
프랑스 출신 칼뱅은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인물로 불리고 있다. 루터가 교회개혁의 선구자라면 칼뱅은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발전시킨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다.
그러나 위대한 개혁자 쟝 칼뱅을 알고 있는 프랑스인은 별로 없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한다.
▲쟝 칼뱅의 생가ⓒ이극범 목사 | |
칼뱅의 생가는 16세기말 카톨릭 교도 연맹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7세기에 조그만 마당을 가진 가옥이 신축되었는데 판화와 사진, 그림들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1차 대전까지는 노와용 시청에 소속이 되어있었으며, 1914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이 집에 '개혁자의 생가'라는 역사적인 장소로 표지판이 붙여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본래의 생가의 모습이 또 한 차례 파손이 되고, 1954년에 다시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 현대식 설비를 갖추게 되었고,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 박물관은 불란서 개신교회의 교회사 회와 노와용 시의 공동 위원회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으며 칼뱅 박물관 후원회가 결성되어 이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대로 프랑스는 종교 개혁에 실패한 카톨릭 국가다. 종교개혁은 실패했지만 위대한 개혁자 칼뱅을 배출한 훌륭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칼뱅이 당시 인문주의를 받아들이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때는 1533년 11월 1일 파리의 꼬르델리에(Cordeliers) 교회에서 소르본느 대학 총장인 니콜라 콥(Nicolars Cop)의 개학식 연설문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니콜라 콥 총장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제로 연설을 했으며, 교황 법령에 의해 명령된 인간의 작품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복음에 나타난 순수한 은총을 통한 구원을 알렸다. 이것은 프랑스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니콜라 콥은 도망가야만 했다. 이 연설문을 작성했던지 최소한 이 강연에 영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정죄를 받은 칼뱅의 망명 생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계속>
생가 주소 : Musee Calvin et Societe des Amis du Musee Calvin
6, place aristide Briand 60400 NOYON FRANCE
Tel. 33-3 4444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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