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튼 야채 가게 지하실에다 한 평 남짓한 방을 만들어 놓고 이사를 했다. 방세도 교통비도 줄이고 출퇴근 시간도 절약할 요량으로 사장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선뜻 허락해 주셨다. 교회에서 연장을 빌리고 나무도 사서 내 손으로 대충 기거할 방을 만들었다. 거기에 침대를 놓고 보니 의자 하나 놓을 공간도 없었다. 형무소 독방보다 더 좁은 공간이었다. 바로 옆에선 냉장고 돌리는 모터 소리가 요란하고 도로변에선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덮여 있는 철판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처음에는 그런 소리들 때문에 밤잠을 설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자장가 삼아 평안히 잠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저녁 8시에 가게 문을 닫은 후 저녁을 대충 챙겨 먹었다. 샤워장이 없으니까 야채를 씻는 싱크대에서 대충 해결했다. 방에는 라디오도 TV도 없어서 9시부터 한 시간 가량은 항상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특별히 이 몸을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써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중보기도의 은사를 주신 것만 같다. 한 가정, 한 가정 믿지 않는 가정들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하게 하셨다.
하루는 온종일 비가 내리니까 몸이 많이 피곤한데 마음까지도 울적해졌다. 고국에 있는 아이들도 아내도 보고 싶었다. 하루 빨리 함게 살아야 할 텐데 상황은 그리 여의치 않아 언제나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자꾸만 내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찌 이렇게도 복이 없는가? 이놈의 밑바닥 인생, 언제나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남들은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사람도 있고, 형제 덕에 잘되는 사람도 있고, 친구 잘 만나 잘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뭐 하나 잘될 만한 건덕지가 없는 듯 느껴졌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몸부림쳐 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영혼은 또다시 음부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을 읽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성경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성경 말씀이 클로즈업 되면서 눈앞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빌립보서 4장 11-13절 말씀이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순간, '아니 바울 사도는 어떻게 해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로마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의 답은 13절에 있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 자신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나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다시 말해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확신이 왔다. 그 순간 이런 기도가 절로 나왔다.
"오 주님, 당신만이 이 종을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 주실 분입니다. 제게 소망을 주시고 이 낙심과 좌절의 늪에서 이 종을 건져 주옵소서."
그렇게 소리 내어 부르짖는 순간 내 안에 감당할 수 없는 평강의 강물의 넘쳐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말씀, 능력 있는 말씀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 눈앞으로 확대되어 다가오던 말씀이 눈에 선하다. 다시금 생각해봐도 그 순간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음부에 빠져서 고통 받던 내 영혼이 저 하늘나라, 평강의 나라로 찰나적으로 올라가던 체험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이라고 확신한다. 이후에도 힘들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때를 따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저녁 8시에 가게 문을 닫은 후 저녁을 대충 챙겨 먹었다. 샤워장이 없으니까 야채를 씻는 싱크대에서 대충 해결했다. 방에는 라디오도 TV도 없어서 9시부터 한 시간 가량은 항상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특별히 이 몸을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써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중보기도의 은사를 주신 것만 같다. 한 가정, 한 가정 믿지 않는 가정들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하게 하셨다.
하루는 온종일 비가 내리니까 몸이 많이 피곤한데 마음까지도 울적해졌다. 고국에 있는 아이들도 아내도 보고 싶었다. 하루 빨리 함게 살아야 할 텐데 상황은 그리 여의치 않아 언제나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자꾸만 내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찌 이렇게도 복이 없는가? 이놈의 밑바닥 인생, 언제나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남들은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사람도 있고, 형제 덕에 잘되는 사람도 있고, 친구 잘 만나 잘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뭐 하나 잘될 만한 건덕지가 없는 듯 느껴졌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몸부림쳐 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영혼은 또다시 음부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을 읽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성경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성경 말씀이 클로즈업 되면서 눈앞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빌립보서 4장 11-13절 말씀이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순간, '아니 바울 사도는 어떻게 해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로마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의 답은 13절에 있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 자신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나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다시 말해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확신이 왔다. 그 순간 이런 기도가 절로 나왔다.
"오 주님, 당신만이 이 종을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 주실 분입니다. 제게 소망을 주시고 이 낙심과 좌절의 늪에서 이 종을 건져 주옵소서."
그렇게 소리 내어 부르짖는 순간 내 안에 감당할 수 없는 평강의 강물의 넘쳐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말씀, 능력 있는 말씀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 눈앞으로 확대되어 다가오던 말씀이 눈에 선하다. 다시금 생각해봐도 그 순간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음부에 빠져서 고통 받던 내 영혼이 저 하늘나라, 평강의 나라로 찰나적으로 올라가던 체험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이라고 확신한다. 이후에도 힘들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때를 따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