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군중’이란 것은 숫자의 힘은 있어도 그 숫자 뒤에 있는 의미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고 봅니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인 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심리의 특징을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익명성입니다. 익명성이란 군중 속에서 자아를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무책임성입니다. 군중 속에서는 개개인의 행동이 불분명하므로 책임없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무비판성이 나타납니다. 군중들은 그 속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이 진리처럼 느껴지게 되거나 의도적으로 무조건 따르는 습성이 생기기도 합니다. 넷째는 군중 전체는 나와 같은 아군이라는 동질감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일체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섯째, 맹목적인 추종이 따르게 됩니다. 이것 저것 따져볼 것 없이 그저 여러사람이 하는대로 따르게 됩니다. 여섯째, 다분히 감정적이 됩니다. 모두가 굉장히 담대해지게 된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개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담대한 행동도 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건물도 때려 부수고 자동차에도 불을 지르고 사람까지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전기가 가장 잘 들어오면서도 양초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대로에서 확성기로 한 달 내내 떠들어도 아무도 안 잡아가는 나라, 경찰을 거지보다도 얕잡아 보는 나라, 광우병은 구경도 못했으면서 가장 무서워 하는 나라, 공산국가도 아니면서 좌익이 제일 판치는 나라, 국민이 뽑아 놓고도 대통령 알기를 초등학교 반장 정도로 아는 나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군중심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군중들의 행동은 때론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참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군중심리를 가장 잘 활용하는 단체 둘을 꼽으라면 첫째는 공산주의이고 둘째는 무엇인지 아세요?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군중심리를 잘 활용하셨더라면 아마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군중들의 그러한 특성을 잘 아셨기 때문에 누구 보다 한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호산나’ 환영하다 갑자기 못 박으라 외친 군중들과 혈루병을 고치고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이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첫째, 군중들이란 확실한 목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군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혹 목적이 있다 해도 그 목적이 달성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병을 고침받고자 하는 확고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는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군중은 많은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아도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저런 의사를 다 찾아 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졌던 재산도 다 써 버렸습니다. 이제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매달리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그러한 것입니다.
셋째, 군중은 아무리 관심이 있어서 함께 모였다 하더라도 흩어지면 끝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결되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그냥 만진 것만이 아닙니다. 만짐과 함께 예수님께 붙들어 매어지는 그래서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봅시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와 봅시다. 그래서 일상 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 붙들어 매어져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전기가 가장 잘 들어오면서도 양초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대로에서 확성기로 한 달 내내 떠들어도 아무도 안 잡아가는 나라, 경찰을 거지보다도 얕잡아 보는 나라, 광우병은 구경도 못했으면서 가장 무서워 하는 나라, 공산국가도 아니면서 좌익이 제일 판치는 나라, 국민이 뽑아 놓고도 대통령 알기를 초등학교 반장 정도로 아는 나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군중심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군중들의 행동은 때론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참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군중심리를 가장 잘 활용하는 단체 둘을 꼽으라면 첫째는 공산주의이고 둘째는 무엇인지 아세요?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군중심리를 잘 활용하셨더라면 아마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군중들의 그러한 특성을 잘 아셨기 때문에 누구 보다 한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호산나’ 환영하다 갑자기 못 박으라 외친 군중들과 혈루병을 고치고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이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첫째, 군중들이란 확실한 목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군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혹 목적이 있다 해도 그 목적이 달성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병을 고침받고자 하는 확고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는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군중은 많은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아도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저런 의사를 다 찾아 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졌던 재산도 다 써 버렸습니다. 이제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매달리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그러한 것입니다.
셋째, 군중은 아무리 관심이 있어서 함께 모였다 하더라도 흩어지면 끝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결되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그냥 만진 것만이 아닙니다. 만짐과 함께 예수님께 붙들어 매어지는 그래서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봅시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와 봅시다. 그래서 일상 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 붙들어 매어져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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