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교회 최창효 목사
날짜 : 2009년 4월 30일 목요일
성경본문 : 빌립보서 2장 5-8절
어떤 선교사님이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바로 이웃하고 있는 할아버지 한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분에게 최대한으로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도 너무 고마워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가자고만하면 얼굴색이 변하고 전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한순간에 전하지 못한채 인간적으로 교재만 하는데 그렇게 하는 중에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공짜다 라고 얘기하면 할아버지 얼굴이 달라지고 화를 내는 표정을 짓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큰 진주를 주면서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종교와 신앙을 따라 마지막 고행의 길, 죽음의 길을 가려고 하는데 이 고행의 길을 갈 때는 돈을 가져가도 안되고 먹을 것을 가져가도 안되고 걸식하면서 길에서 자면서 가야 됩니다. 그렇게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죽거나 그 전에 죽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종교의 교훈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값으로 따져도 엄청나게 비쌀 보물을 전해주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사도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다른 가족친척도 없고 마지막 가는 길에 가져갈 수 없다니까 받으면서 "그러면 제가 얼마 안되지만 이 진주의 값을 쳐드리겠습니다. 값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면서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나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죽은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바닷가에서 죽어있었는데 손으로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왜 그런가 손을 펴봤더니 거기서 진주가 나왔는데 아들은 이 진주를 캐기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죽은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돈으로 계산해서 받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아들의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은 그 구원의 사실을 믿는 믿음은 돈으로 계산된 것이 아닙니다. 값이 없는 것이 아니고 너무 값이 귀한 것이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할아버지가 이해가 조금 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고행을 떠나지 않고 예수를 믿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또 나치정권에 항거하고 비밀결사 정부 조직해서 반 정부 운동했던 디히트리 본훼퍼 목사님이 죽기전에 이런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 'Cheap Grace'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구원은 값이 없는 것이지 값이 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총은 너무 귀한 것이기에 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프리 기프트, 공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생각하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희생은 너무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우선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서 스스로 포기하셨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믈이 그에게서 창조되고 그 만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 받으시기 합당한 분인데 그런 지위, 그런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분, 버리신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저의 집에 제 옷을 넣어두는 옷장이 있는데 그 옷장을 보면 1년 동안 한번도 안 입은 옷들이 걸려있는 것을 가끔 보면, 사실 그런 옷은 버려야 하는데 막상 버리자는 쉽지 않더라구요.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데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버리지 않을 떄가 너무 많습니다. 쓸 데가 없는 것도 어떻게 하다보면 그냥 놔두게 되고 그런 것들이 집안에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버리기 아까운 것도 많은데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다는 거예요. 그 엄청난, 그 귀한, 그 값진 지위를, 그런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엣 이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낮아지셨다는 거죠. 종의 형체를 지기까지 죽으셨다. 우리가 친구와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겸손한 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 있냐, 나도 있다, 너 잘났냐, 나도 잘났다. 너 배웠냐, 나도 배웠다" 이렇게는 말하지만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며 겸손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배움의 목적이 높아지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분과 지위를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람의 종이 되야 하리라. 섬김을 받기 보다 섬기는 자가 되라. 대접 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라고 교훈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삶 자체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낮아지심의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복종하심으로 그의 희생을 증거해보이셨습니다. 보통 순종과 복종의 차이를 크게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순종은 윗 사람이 시킬 때에 내가 할 수 있고 내 뜻에 어느정도 합당하다고 거기에 동의한다고 할 때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은 난 그거 할 수 없어요 하기 싫어요 그리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시키니까 알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을 넘어 복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종은 내 자존심, 고집, 또는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복종이 되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다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내가 밤새도록 고시를 잡았지만 허탕쳤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다. 베드로는 고기잡이 전문가입니다. 일생을 바닷가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 만큼은 자신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과 여건이 지금은 바다에 내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고기잡이에 허탕을 쳤고 그물을 씻는 피곤함, 배고픔에 지친 상황에서 다시 그물을 가지고 바닷가에 들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데 바닷가에 그물을 내려 고기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복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이 잔을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원, 내소원, 내 생각, 내 주장은 이 십자가를 안지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기 포기에 의한 복종이고 자기 포기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수고, 포기가 아니고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포기를 누가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좋다 하면서 어느 정도의 손해다, 그거 하면서 마음이 좀 나쁘다 그 정도가 아니고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그 포기가 얼마나 복종이 얼만나 어렵겠냐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바아바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너무나도 고귀한,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에 살래야 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이 구원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값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그리고 이웃에게 이 선물을 나눠주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날짜 : 2009년 4월 30일 목요일
성경본문 : 빌립보서 2장 5-8절
어떤 선교사님이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바로 이웃하고 있는 할아버지 한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분에게 최대한으로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도 너무 고마워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가자고만하면 얼굴색이 변하고 전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한순간에 전하지 못한채 인간적으로 교재만 하는데 그렇게 하는 중에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공짜다 라고 얘기하면 할아버지 얼굴이 달라지고 화를 내는 표정을 짓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큰 진주를 주면서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종교와 신앙을 따라 마지막 고행의 길, 죽음의 길을 가려고 하는데 이 고행의 길을 갈 때는 돈을 가져가도 안되고 먹을 것을 가져가도 안되고 걸식하면서 길에서 자면서 가야 됩니다. 그렇게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죽거나 그 전에 죽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종교의 교훈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값으로 따져도 엄청나게 비쌀 보물을 전해주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사도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다른 가족친척도 없고 마지막 가는 길에 가져갈 수 없다니까 받으면서 "그러면 제가 얼마 안되지만 이 진주의 값을 쳐드리겠습니다. 값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면서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나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죽은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바닷가에서 죽어있었는데 손으로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왜 그런가 손을 펴봤더니 거기서 진주가 나왔는데 아들은 이 진주를 캐기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죽은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돈으로 계산해서 받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아들의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은 그 구원의 사실을 믿는 믿음은 돈으로 계산된 것이 아닙니다. 값이 없는 것이 아니고 너무 값이 귀한 것이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할아버지가 이해가 조금 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고행을 떠나지 않고 예수를 믿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또 나치정권에 항거하고 비밀결사 정부 조직해서 반 정부 운동했던 디히트리 본훼퍼 목사님이 죽기전에 이런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 'Cheap Grace'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구원은 값이 없는 것이지 값이 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총은 너무 귀한 것이기에 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프리 기프트, 공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생각하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희생은 너무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우선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서 스스로 포기하셨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믈이 그에게서 창조되고 그 만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 받으시기 합당한 분인데 그런 지위, 그런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분, 버리신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저의 집에 제 옷을 넣어두는 옷장이 있는데 그 옷장을 보면 1년 동안 한번도 안 입은 옷들이 걸려있는 것을 가끔 보면, 사실 그런 옷은 버려야 하는데 막상 버리자는 쉽지 않더라구요.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데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버리지 않을 떄가 너무 많습니다. 쓸 데가 없는 것도 어떻게 하다보면 그냥 놔두게 되고 그런 것들이 집안에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버리기 아까운 것도 많은데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다는 거예요. 그 엄청난, 그 귀한, 그 값진 지위를, 그런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엣 이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낮아지셨다는 거죠. 종의 형체를 지기까지 죽으셨다. 우리가 친구와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겸손한 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 있냐, 나도 있다, 너 잘났냐, 나도 잘났다. 너 배웠냐, 나도 배웠다" 이렇게는 말하지만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며 겸손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배움의 목적이 높아지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분과 지위를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람의 종이 되야 하리라. 섬김을 받기 보다 섬기는 자가 되라. 대접 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라고 교훈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삶 자체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낮아지심의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복종하심으로 그의 희생을 증거해보이셨습니다. 보통 순종과 복종의 차이를 크게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순종은 윗 사람이 시킬 때에 내가 할 수 있고 내 뜻에 어느정도 합당하다고 거기에 동의한다고 할 때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은 난 그거 할 수 없어요 하기 싫어요 그리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시키니까 알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을 넘어 복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종은 내 자존심, 고집, 또는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복종이 되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다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내가 밤새도록 고시를 잡았지만 허탕쳤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다. 베드로는 고기잡이 전문가입니다. 일생을 바닷가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 만큼은 자신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과 여건이 지금은 바다에 내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고기잡이에 허탕을 쳤고 그물을 씻는 피곤함, 배고픔에 지친 상황에서 다시 그물을 가지고 바닷가에 들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데 바닷가에 그물을 내려 고기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복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이 잔을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원, 내소원, 내 생각, 내 주장은 이 십자가를 안지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기 포기에 의한 복종이고 자기 포기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수고, 포기가 아니고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포기를 누가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좋다 하면서 어느 정도의 손해다, 그거 하면서 마음이 좀 나쁘다 그 정도가 아니고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그 포기가 얼마나 복종이 얼만나 어렵겠냐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바아바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너무나도 고귀한,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에 살래야 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이 구원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값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그리고 이웃에게 이 선물을 나눠주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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