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 |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金永錫)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사제 수품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김 추기경은 이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이신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는데,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편 유학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공의회를 통해 자성하고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社說)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 무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한국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은 1966년 5월 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교정에 열렸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 문구를 훗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교구의 기초를 닦으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주교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다.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주교직에 오른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였기에 그의 머릿속에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울대교구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 생활을 한 30년 동안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인 1968년 말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다. 30년 후인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국내외 원조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돕기, 골수·제대혈기증, 장기기증, 국내입양운동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었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도시빈민·탈북주민·외국인 노동자·매매 여성·미혼모·무주택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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