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마지막 주일이었던 지난달 28일, 김남준 목사는 끝내 2부 예배를 인도하지 못했다. 혹사로 감기몸살이 너무 심해졌던 탓이었다. 개척 후 15년간 어떤 일이 있어도 강단을 사수해 온 김 목사였다. 설교는 1부 예배 때의 영상으로 대신하고 그는 링거를 맞으며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29일 월요일, ‘공부하는 날’이 되자 김 목사는 미처 낫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교회로 나와 오전 9시부터 정확히 오후 9시 10분까지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쓴 <게으름>은 그의 이런 삶이 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5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찔림을 경험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히 살면서 스스로를 ‘고3’이라 생각하고 “고3이 하고 싶은 것 미루면서 대학 가서 하자고 마음먹듯, 하고 싶은 것 미루면서 천국 가서 하자고 생각한다”는 김남준 목사가 신간 <존 오웬의 신학(부흥과개혁사)>을 펴냈다. 그가 이전에 썼던 수많은 베스트셀러에서 가장 자주 인용했고, 머릿말에서도 밝혔듯 “그를 신앙과 신학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구원의 은혜 다음으로 가장 큰 축복”이라 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 존 오웬의 이름을 내건 첫번째 책이다. ‘청교도 목회자’ 김남준 목사를 있게 한 존 오웬에 대해 듣기 위해 안양 열린교회를 찾았다.
한국교회, 신앙의 본질 놓치고 피상성 빠져
-존 오웬은 어떤 신학자인가.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존 오웬은 교회사 속 한 인물이고, 청교도 신학자다. 개인적으로는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지난 15년 전, 무리한 사역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때 그의 전집을 접하고 그의 영적인 깊이와 논리성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의 신학을 탐구하고 공부하면서 15년간 목회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한국교회는 현재 교회 전반에서 ‘신앙의 피상성’에 빠져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고, 여기에 인간 문제의 답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본질에서 많이 이탈했다. 기독교 신앙의 참된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또 개개인의 삶에서는 영적인 변화가 없다. 이는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깊이가 현저히 부족한 탓이다. 영적 경험이란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의 경험인데, 이는 경건의 씨앗이 된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삶에서 복음의 신비가 사라지니 ‘신비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시대에 가장 비합리적인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오웬의 외침은 가치있다. 청교도이면서 개혁파 정통주의 거목이다. 그는 주님을 깊이 체험했던 동시에 탁월한 학자였던, 경건과 학문을 동시에 섭렵했던 위대한 신학자이고 목회자였다.
우리 신앙의 뿌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존 오웬은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갈 곳을 알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은 과거에도 고민했던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처음 기독교(개신교) 신앙의 참된 뿌리가 된 개혁교회가 오류와 싸우면서 진리를 붙들었던 모습을 존 오웬을 통해 알 수 있다.”
성경은 무작정 격려 아닌 ‘바른 용기’를 갖게 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는데, 존 오웬도 인간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추구했다. 어떤 점이 다른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필요한 것과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긍정과 희망을 말하면서 사람을 격려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반응할 수는 있겠지만, 성경은 격려 그 자체가 아니라 ‘바르게 용기를 갖는 것’을 말한다. 디모데후서에 나오듯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오류에 빠지고, 옳은 것을 알아도 행하지 않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기독교 안에서 공급해준다는 미명 하에 끊임없는 복음의 양보와 타협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복음을 많이 흐리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존 오웬은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로 인간이 돌아가고, 거기에 필요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인간에 대한 탐구나 추구는 병상에 있는 사람에게 환자가 원하는 음식을 요리해주는 것이고, 이 사람(존 오웬)은 환자의 병 상태를 하나님 말씀으로 찍어서 그에게 이런 질병에 걸려서 이런 문제가 있으니 치료를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와 같다.”
-얼마 전 존엄사 문제와 관련해 세브란스 원목실장이 밝혔듯, 기독교가 세상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설득시키기보다는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붙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려면 확신하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과연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성화의 삶 없다면 처음 받은 칭의의 기쁨도 점차 사라져
-그래서 늘 죄와 칭의, 성화라는 신앙의 본질적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
“성경적으로 보면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화의 소명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화란 본질적으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변화돼 가는 것인데, 인격이 변하고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에게 진실한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처음 받은 구원은 칭의이고, 이후 거룩해져 가는 것이 성화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고, 성화는 주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셨지만 인간이 협력하면서 변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에게 성화의 삶이 없다면 처음 받았던 칭의의 기쁨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신자는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변화돼야 하는데 이를 포기하면 자기가 받은 구원도 기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무료 티켓으로 전락했고, 재산이 늘어나고 대박이 터져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화’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너무 감성화돼 버렸다. 감성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성령은 전인적이시다. 지성과 감성, 의지가 조화를 이뤄야지 감성적으로만 가면 마치 갑옷을 입지 않은 군인 같아진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철저한 교리와 사상으로 무장이 돼야 하고, 성경에 대한 진리들이 매일 경건생활로 타오르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결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잃어버렸고, 교회에서는 교리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목회자들은 사실 전도를 위해 세상과의 접촉점을 찾고 있는데.
“먼저 목회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기독교 진리는 무엇인지 역사적인 사상을 알고, 어떻게 이단의 훼방을 넘어 진리를 입증해왔는지 공부하고 교리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안에 풍부하게 성도들이 변화돼야 한다.
설교도 그렇다. 설교가 끝났을 때 거기에 진리가 들어있는가.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다. 설교가 오프라 윈프리 쇼나 아침마당처럼 굳건한 진리 안에 서 있지 않고, 인생 살면서 필요한 지혜를 주는…. 또 설교가 끝났을 때 회개라는 것이 있는가. 회심이 없이 구원이 없는데, 설교에 세속을 혼합해서 마시기 좋은 음료수처럼 제공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약인데. 그래서 괄목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럼에도 복음사역을 계속 하다보니 일 중심, 관계 중심으로 가게 된다.
세상과 달라질 때 사람들 교회로 돌아올 것
그렇게 가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잘못됐다. 성경은 기독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길은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에 앉은 이를 일으키는 사건(행 3:1-10)을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세상에 없는 것을 가지고 세상과 달라져야 하는데, 같아지려 한다.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내가 21살 때 회심했는데, 당시 교회에 가고싶은 이유가 저기에 가면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고민을 할 것 같아서였다. 건물부터 흔히 볼 수 없는, 굉장히 성스러운 느낌에 끌렸다.”
-개척·미자립교회처럼 공부에만 매달릴 수 없는 목회자들도 많은데.
“사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교회가 클수록 더 바빠진다. 2년 동안 휴가도 가지 못했다. 눈코뜰새 없다. 가족끼리 식사를 한 번 하려 해도 비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다. 의지만 있으면 된다. 책 살 돈이 없다면 도서관에라도 가서 읽을 수 있다.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다. 무엇보다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음날인 29일 월요일, ‘공부하는 날’이 되자 김 목사는 미처 낫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교회로 나와 오전 9시부터 정확히 오후 9시 10분까지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쓴 <게으름>은 그의 이런 삶이 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5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찔림을 경험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히 살면서 스스로를 ‘고3’이라 생각하고 “고3이 하고 싶은 것 미루면서 대학 가서 하자고 마음먹듯, 하고 싶은 것 미루면서 천국 가서 하자고 생각한다”는 김남준 목사가 신간 <존 오웬의 신학(부흥과개혁사)>을 펴냈다. 그가 이전에 썼던 수많은 베스트셀러에서 가장 자주 인용했고, 머릿말에서도 밝혔듯 “그를 신앙과 신학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구원의 은혜 다음으로 가장 큰 축복”이라 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 존 오웬의 이름을 내건 첫번째 책이다. ‘청교도 목회자’ 김남준 목사를 있게 한 존 오웬에 대해 듣기 위해 안양 열린교회를 찾았다.
한국교회, 신앙의 본질 놓치고 피상성 빠져
-존 오웬은 어떤 신학자인가.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존 오웬은 교회사 속 한 인물이고, 청교도 신학자다. 개인적으로는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지난 15년 전, 무리한 사역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때 그의 전집을 접하고 그의 영적인 깊이와 논리성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의 신학을 탐구하고 공부하면서 15년간 목회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한국교회는 현재 교회 전반에서 ‘신앙의 피상성’에 빠져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고, 여기에 인간 문제의 답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본질에서 많이 이탈했다. 기독교 신앙의 참된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또 개개인의 삶에서는 영적인 변화가 없다. 이는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깊이가 현저히 부족한 탓이다. 영적 경험이란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의 경험인데, 이는 경건의 씨앗이 된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삶에서 복음의 신비가 사라지니 ‘신비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시대에 가장 비합리적인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오웬의 외침은 가치있다. 청교도이면서 개혁파 정통주의 거목이다. 그는 주님을 깊이 체험했던 동시에 탁월한 학자였던, 경건과 학문을 동시에 섭렵했던 위대한 신학자이고 목회자였다.
우리 신앙의 뿌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존 오웬은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갈 곳을 알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은 과거에도 고민했던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처음 기독교(개신교) 신앙의 참된 뿌리가 된 개혁교회가 오류와 싸우면서 진리를 붙들었던 모습을 존 오웬을 통해 알 수 있다.”
성경은 무작정 격려 아닌 ‘바른 용기’를 갖게 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는데, 존 오웬도 인간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추구했다. 어떤 점이 다른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필요한 것과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긍정과 희망을 말하면서 사람을 격려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반응할 수는 있겠지만, 성경은 격려 그 자체가 아니라 ‘바르게 용기를 갖는 것’을 말한다. 디모데후서에 나오듯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오류에 빠지고, 옳은 것을 알아도 행하지 않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기독교 안에서 공급해준다는 미명 하에 끊임없는 복음의 양보와 타협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복음을 많이 흐리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존 오웬은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로 인간이 돌아가고, 거기에 필요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인간에 대한 탐구나 추구는 병상에 있는 사람에게 환자가 원하는 음식을 요리해주는 것이고, 이 사람(존 오웬)은 환자의 병 상태를 하나님 말씀으로 찍어서 그에게 이런 질병에 걸려서 이런 문제가 있으니 치료를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와 같다.”
-얼마 전 존엄사 문제와 관련해 세브란스 원목실장이 밝혔듯, 기독교가 세상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설득시키기보다는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붙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려면 확신하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과연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성화의 삶 없다면 처음 받은 칭의의 기쁨도 점차 사라져
▲김남준 목사의 저서 <존 오웬의 신학>. 존 오웬의 신학세계를 개괄적으로 담은 책이다. 김 목사는 앞으로 7백쪽에 3권 규모로 존 오웬의 신학을 본격 집필할 구상을 갖고 있기도 하다. | |
-그래서 늘 죄와 칭의, 성화라는 신앙의 본질적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
“성경적으로 보면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화의 소명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화란 본질적으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변화돼 가는 것인데, 인격이 변하고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에게 진실한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처음 받은 구원은 칭의이고, 이후 거룩해져 가는 것이 성화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고, 성화는 주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셨지만 인간이 협력하면서 변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에게 성화의 삶이 없다면 처음 받았던 칭의의 기쁨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신자는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변화돼야 하는데 이를 포기하면 자기가 받은 구원도 기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무료 티켓으로 전락했고, 재산이 늘어나고 대박이 터져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화’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너무 감성화돼 버렸다. 감성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성령은 전인적이시다. 지성과 감성, 의지가 조화를 이뤄야지 감성적으로만 가면 마치 갑옷을 입지 않은 군인 같아진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철저한 교리와 사상으로 무장이 돼야 하고, 성경에 대한 진리들이 매일 경건생활로 타오르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결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잃어버렸고, 교회에서는 교리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목회자들은 사실 전도를 위해 세상과의 접촉점을 찾고 있는데.
“먼저 목회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기독교 진리는 무엇인지 역사적인 사상을 알고, 어떻게 이단의 훼방을 넘어 진리를 입증해왔는지 공부하고 교리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안에 풍부하게 성도들이 변화돼야 한다.
설교도 그렇다. 설교가 끝났을 때 거기에 진리가 들어있는가.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다. 설교가 오프라 윈프리 쇼나 아침마당처럼 굳건한 진리 안에 서 있지 않고, 인생 살면서 필요한 지혜를 주는…. 또 설교가 끝났을 때 회개라는 것이 있는가. 회심이 없이 구원이 없는데, 설교에 세속을 혼합해서 마시기 좋은 음료수처럼 제공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약인데. 그래서 괄목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럼에도 복음사역을 계속 하다보니 일 중심, 관계 중심으로 가게 된다.
세상과 달라질 때 사람들 교회로 돌아올 것
그렇게 가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잘못됐다. 성경은 기독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길은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에 앉은 이를 일으키는 사건(행 3:1-10)을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세상에 없는 것을 가지고 세상과 달라져야 하는데, 같아지려 한다.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내가 21살 때 회심했는데, 당시 교회에 가고싶은 이유가 저기에 가면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고민을 할 것 같아서였다. 건물부터 흔히 볼 수 없는, 굉장히 성스러운 느낌에 끌렸다.”
-개척·미자립교회처럼 공부에만 매달릴 수 없는 목회자들도 많은데.
“사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교회가 클수록 더 바빠진다. 2년 동안 휴가도 가지 못했다. 눈코뜰새 없다. 가족끼리 식사를 한 번 하려 해도 비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다. 의지만 있으면 된다. 책 살 돈이 없다면 도서관에라도 가서 읽을 수 있다.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다. 무엇보다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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