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TIME지가 세계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사람들이라 했다. 왜 그들이 행복한지 그 주민들의 주장을 덧 부쳤다. 첫째는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둘째는 단순하게 산다. 셋째 서로 사랑한다. 넷째 먹을 것이 풍부하다(산에는 과실과 바다에는 고기가 많다) 다섯째 아름다운 섬에서 산다.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외로운 작은 섬에서 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관광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 돈으로 사는 모습이 처량하다고 할지 모르나 그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섬사람들처럼 행복 했다. 한 무명인의 노래처럼 “말 없는 청산이요 때 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몸이 문벌 없이 늙으리라”고 하며 단순하게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다. 농민들은 하루 종일 일하다가 해가 져서 집에 들어와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놓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워서 “밥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의 살림살이 이만 하면 족하도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 했는데 오늘날 왜 행복 지수가 떨어질까? 물질문명의 이기와 삶의 편리함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많은 시설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살하는 숫자가 해 마다 늘어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풍부한 지식이나 부요한 물질문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면으로는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욕(본능)을 채우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대표적인 조건은 돈이다. 그 다음에 명예, 권력 등이 뒤를 따른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창조적인 면에서 행복을 찾는다. 마치 농부가 일 년 내내 구슬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거름 주고 김을 매서 가을철에 황금물결 치는 벼 이삭들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사랑의 열매로 자녀를 낳아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고생을 해서 키워 놓은 자녀들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잘 살 때 부모는 행복한 것이다. 더욱이 힘든 노력이 성취 되어 가족의 단위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에는 그 행복은 더 커지는 것이다. 그 도움이란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말한다.
최근 세계적 talk show 여왕 오프라 원프리가 얼마 전에 Stanford대학교의 졸업식에서 행한 축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축사 중에 행복에 관한 말이 나온다.
“여러분 들은 자신보다 뭔가 더 큰 것을 위해 살며 그 중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오.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뭔가를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고통을 받았다면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여러분이 수렁에 빠졌던 경험이 있으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십시오. 마틴 루터의 말처럼 누구나 다 유명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위대해질 수는 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섬길 수는 있습니다. 은혜로 충만한 가슴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섬길 수 있고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다. 우리가 알기는 소유의 인간과 창조의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속에 양면이 같이 레슬링을 하고 있다. 문제는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 행복의 질이 달라진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결혼과 이혼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 하며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안고 남들의 눈을 피해 외롭게 살았다. 그 녀는 소유에서 행복을 찾아 헤맨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런 주석을 붙인다. 이 미모의 여인은 결혼에서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해 이혼 하고는 두 번째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은 무능 하고 생활 능력이 없어 헤어지고 세 번째 돈 많은 남자를 만났으나 무식해서 살맛이 없어 그를 떠나서 네 번째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밤마다 울다 다섯째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황소 같아 힘은 세지만 자주 두들겨 패서 못 살고 도망갔다.
그런 파란 곡조가 많은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자 지금까지 지닌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더욱 신령한 세계를 소개 할 때에 매력을 느꼈다. 그 녀는 메시야를 바로 알고는 그 분을 따르며 자기 사는 곳에서 선교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녀는 바뀐다.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창녀가 되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창조의 삶으로 바뀐 후에는 참 행복을 깨닫고 멋지게 살았다. 새 해에는 모두 창조의 행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섬사람들처럼 행복 했다. 한 무명인의 노래처럼 “말 없는 청산이요 때 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몸이 문벌 없이 늙으리라”고 하며 단순하게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다. 농민들은 하루 종일 일하다가 해가 져서 집에 들어와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놓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워서 “밥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의 살림살이 이만 하면 족하도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 했는데 오늘날 왜 행복 지수가 떨어질까? 물질문명의 이기와 삶의 편리함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많은 시설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살하는 숫자가 해 마다 늘어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풍부한 지식이나 부요한 물질문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면으로는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욕(본능)을 채우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대표적인 조건은 돈이다. 그 다음에 명예, 권력 등이 뒤를 따른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창조적인 면에서 행복을 찾는다. 마치 농부가 일 년 내내 구슬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거름 주고 김을 매서 가을철에 황금물결 치는 벼 이삭들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사랑의 열매로 자녀를 낳아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고생을 해서 키워 놓은 자녀들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잘 살 때 부모는 행복한 것이다. 더욱이 힘든 노력이 성취 되어 가족의 단위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에는 그 행복은 더 커지는 것이다. 그 도움이란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말한다.
최근 세계적 talk show 여왕 오프라 원프리가 얼마 전에 Stanford대학교의 졸업식에서 행한 축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축사 중에 행복에 관한 말이 나온다.
“여러분 들은 자신보다 뭔가 더 큰 것을 위해 살며 그 중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오.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뭔가를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고통을 받았다면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여러분이 수렁에 빠졌던 경험이 있으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십시오. 마틴 루터의 말처럼 누구나 다 유명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위대해질 수는 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섬길 수는 있습니다. 은혜로 충만한 가슴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섬길 수 있고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다. 우리가 알기는 소유의 인간과 창조의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속에 양면이 같이 레슬링을 하고 있다. 문제는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 행복의 질이 달라진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결혼과 이혼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 하며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안고 남들의 눈을 피해 외롭게 살았다. 그 녀는 소유에서 행복을 찾아 헤맨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런 주석을 붙인다. 이 미모의 여인은 결혼에서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해 이혼 하고는 두 번째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은 무능 하고 생활 능력이 없어 헤어지고 세 번째 돈 많은 남자를 만났으나 무식해서 살맛이 없어 그를 떠나서 네 번째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밤마다 울다 다섯째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황소 같아 힘은 세지만 자주 두들겨 패서 못 살고 도망갔다.
그런 파란 곡조가 많은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자 지금까지 지닌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더욱 신령한 세계를 소개 할 때에 매력을 느꼈다. 그 녀는 메시야를 바로 알고는 그 분을 따르며 자기 사는 곳에서 선교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녀는 바뀐다.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창녀가 되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창조의 삶으로 바뀐 후에는 참 행복을 깨닫고 멋지게 살았다. 새 해에는 모두 창조의 행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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