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己丑年) 새해가 밝았다. 한국교회는 지난 한 해 ‘교회의 신뢰회복’이라는 화두를 놓고 다방면에서 적지 않은 수고와 희생을 해왔다. 특히 죽음의 빛이 드리웠던 태안 앞바다에서 보인 눈물의 헌신은 한국사회에 큰 감동을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내적으로 교단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과 각종 분쟁, 기독 연예인의 잇단 자살 등으로 홍역을 치르고, 외적으로 모 방송사의 신성모독, 종교편향 논란, 경제위기 등에 시달렸다
같은 사안을 2009년 새해에도 과제로 남아, 한국교회의 자성과 헌신, 그리고 결단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교회 지도자 3인을 각각 만나 대담을 통해 한국교회의 지나온 길을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올해 신년대담에서는 평양대부흥의 진원지인 장대현교회 전도사 출신으로, 올해로 99세를 맞은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 세계복음주의연맹(WEA) 회장으로 한국교회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이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증경총회장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업에 앞장서 온 이정익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대담=류재광 국장, 정리=김진영 기자, 사진=송경호 기자]
“자꾸 위기 위기 하는데, 한국교회 위기 아니야”
방지일 목사를 만나기 전,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갈지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이런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겠다는. 또 신선한 화두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컸다.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자 평양대부흥의 여운을 몸소 체험한 그를 만나는 모처럼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시작되고 문답이 오가면서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방 목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파릇한 젊은이들의 생각이 백발(白髮)의 세월을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로에게 교회의 갈 길을 물으려다 신앙의 도리를 배웠다. 다음은 방 목사와의 일문일답.
-목사님께서 태어나셨을 당시만 해도 복음화율이 높지 않았는데, 신앙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목사셨어.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지. 당시에는 교회도 많이 없었고, 유교의 영향도 강했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에 신앙을 키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어.”
-요즘 연말연시를 맞아서 교계 여러 모임에서 메시지를 전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는지요.
“속죄와 성령, 그리고 예수님.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해. 특히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지, 내가 예수님을 지배하면 안 되거든. 잘못하면 내가 (내 삶을) 주장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 주님께 투항해야 해. 무장해제. 투항했으면 무장을 해제해야지. 내 주관, 내 의견을 내려놓고 말이야.”
-최근 한국교회 내에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에 대한 견해가 어떠신지요.
“위기라……. 반성하고 더 잘하자는 의미에서 그런 말 하는 게 나쁘진 않아. 하지만 위기가 아니야. 나는 중국에 21년 있었는데, 그 나라엔 자유가 없어. 마음놓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야. 그곳에 있다가 한국에 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교회 가서 찬양하고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아시아에서 한국만큼 복음화된 나라가 어디 있어. 왜 사람들이 자꾸 위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실제로 성장세가 둔화되고 한국교회 신뢰도 설문조사에서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교인수가 줄어든 건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래. 나는 아이 세 명 안낳을 거면 주례도 안 서준다고 그랬어. 그게 원인이야. 주일학교에 아이가 없잖아.
이미지라는 것도 그래. 이미지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한국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질 수 있었겠어. 국회조찬기도회도 가보면 국회의원들 중에 장로가 12명이고 그 중에는 목사도 2명이나 있다고. 다만, 회장이나 대표 뽑을 때 선거운동을 많이 하고 서로 자기가 하려고 하는 걸 보면, 그런 부분은 좀 반성해야 될 것 같아. 양보하고 그래야지.
예전에는 길 기다가 열 사람 만나면 그 중에 여덟아홉 사람은 교회 나가는 거 찬성하고 그랬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그럴 뿐이지 절대 위기는 아니야. 교회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자꾸 위기라고 하는데, 위축될 필요 없어. 지금 교회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나는 공산치하에 있는 나라 있다가 여기 오니 정말 자유롭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
“예배는 거룩하게… ‘Again’이라는 단어 왜 썼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는데, 당시와 지금의 교회를 비교하신다면.
“평양에서 부흥회를 할 때는 인도하는 사람이 ‘통성기도는 자신의 말이 들릴락말락하게 하라’고 했어.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기도하라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커. 꼭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방해가 되니까 그냥 집에 가기도 하더라구. 예배 때 박수도 안 쳤어. 지금은 안 그렇잖아. 노래하고 박수치고. 세월이 바뀌고 그랬으니까 그게 꼭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하지만 예배는 좀 경건하게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예전에 연세대 교수 한 사람이 교회에서 성가 지휘를 하는데 목사가 그 와중에 옆 사람과 의논하는 걸 봤던 모양이야. 중간에 딱 멈추고는 야단을 쳤다는 거야. 지금 예배 중 아니냐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하고 있는 중에 어떻게 의논을 하느냐고.
어떤 사람은 막 흥분하고 그래. 흥분이 신앙은 아니거든. 술을 마셔도 흥분은 하잖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가슴을 치고 하는 그런 흥분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해야지. ‘오 주여’하면서 막 소리를 질러. 하나님 귀 안 먹었어. 하나님 못 들을까봐 그렇게 하나?”
-2007년은 평양대부흥 1백주년 행사로 한국교회가 분주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그 때를 평가해 주십시오.
“내가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많은 행사가 ‘Aga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데 참 잘못됐어. 다시 부흥해야 한다니, 그럼 평양대부흥 이후 지금까지 성령님은 쿨쿨 자고 계셨나? 지난날을 돌아봐봐. 예전에 나 중국에서 선교하다 한국에 왔을 때 성도 60만 운동, 100만 운동 하고 그랬거든. 지금은 예장 통합만 300만이야.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컸어. 그런데 다시라니. 우리가 다 하나님 은혜로 독립도 이루고 경제성장 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야?
(독립을 말하면서 방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 얘기도 꺼냈다. 그가 독립 후 대한민국 1차 국회를 기도로 시작했다고. 당시 기도문도 보여줬다. 대화는 평양대부흥에서 자연스레 독립운동 쪽으로 흘렀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기독교인이 많았어. 그 중에 길선주 목사님은 내 아버지 같은 분이야. 기독교인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나라의 독립하고는 사실 상관이 없지. 내가 이런 말 하면 그럼 역사를 무시하자는 말이냐며 발끈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목사로서 분명한 사명이 있다는 말이야. 길선주 목사님도 목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33인에 들어가신 거지.”
“북한에 줄 건 줘야… 늘 후회하고 실수하고 그래”
-최근에 남북관계 경색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이북이 고향이셔서 남북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은데,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정치적으로 할 말은 없고, 북한을 좀 돕긴 도와야지. 얼마전에도 북한에 폐결핵 약을 보낸다고 해서 설교한 일이 있는데…, 교회가 쌀도 많이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그거 보내봤자 가난한 사람들한테 안 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굶어죽는다는데 보낼 건 보내야해. 굳이 반대할 건 없어. 나는 국가재정의 1%를 북한을 돕는 데 쓰자는 입장이야. 미국 가면 목사가 북한 왜 돕느냐고 해. 북한이 그걸로 핵무기 만들 건데 왜 돕느냐는 거지. 그래도 어떡해, 옆에서 굶어죽어간다는데. 북한 돕는 사람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거야.”
-신앙의 여정이 기셨던 만큼 돌아보면 보람됐던 일도, 후회됐던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보람됐던 일이야 많지만, 중국에 있을 때 공산당에게 문초(問招)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할 말을 주신다고 하잖아. 나는 혼잔데, 저쪽은 100명 가까이 있고 두 명씩 나와서 문초를 해. 그 사람들이 철학, 역사, 심지어는 성경까지 읽고 와서 물어보거든. 그런데 신기하게 다 대답을 했어. 성경을 묻길래 내가 그랬지. 예수 믿느냐고. 허허.
그리고 내가 요즘 TV에도 출연하니까 30~40년 전에 알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럼 참 반갑고, 그 때 젊었던 사람들이 다 나이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 돼서 오면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느끼지. 그런게 보람돼.
후회라면 매일 후회하고, 실수하고 그래. 하나님께 온전히 다 맡기고 살아야 하는데 내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할 때가 있거든. 예배 드릴 때 순서가 잘못되진 않았나, 설교 할 때도 내 생각이 개입돼서 좀 재미있게 해보자는 꾀를 내진 않았나 돌아보지. 날마다 그러면서 살아.”
“늘 새해처럼 살아라… 내 목회경험이 때론 시험”
-새해가 밝았습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한 말씀 하신다면.
“새해라고 해서 별 게 있나. 달력이 바뀌니까 새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새해처럼 살아야 해. 언제나 주 안에서, 날마다 새 피조물이 돼서 그렇게 말이야. 내가 온전히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사는 거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걸 알아야 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려고 해도 죄 때문에 못 가거든. 이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거야. 복음, 이걸 알아서 전하는 사람이 목사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건 직장에 취직한 거지 목사가 된 게 아니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게 있어. 그 대작곡가가 완결하지 않았다는 거야. 인생이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뛰었던 사도처럼 말이야. 항상 그렇게 살려고 해. 때론 내 목회경험이 마귀처럼 시험처럼 느껴져. 그것에 자족하고 살까봐. 늘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방 목사는 지팡이를 짚는다. 그래도 걸을 때면 휘청휘청한다. 대화 중에도 몇 번이나 손바닥을 귀에 댔다. 그러면 어김없이 큰 소리로 질문을 다시 해야 했다. 그렇게 노쇠한 그였지만 그만큼 신앙의 연륜도 느껴졌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신앙의 진수(眞髓)가 묻어났다. 대담이 끝났을 때 방 목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대접한 게 별로 없다며 미안해 했다. 많이 느끼고 배웠다 했더니, 손자뻘 되는 기자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서는데 자꾸만 아쉬웠다. 그의 신앙을 글로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일까.
방지일 목사는
1911년 5월 21일 평북 선천 출생. 1933년 평양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7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같은해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 목사 안수(퍙양노회)를 받은 방 목사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돼 21년간 사역했다. 1958년 영등포교회 부임 후 예장 통합 한남노회장, 경기노회장을 거쳐 제56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이자 장로교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로 있으며 숭실인상 추양목회대상,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했다.
같은 사안을 2009년 새해에도 과제로 남아, 한국교회의 자성과 헌신, 그리고 결단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교회 지도자 3인을 각각 만나 대담을 통해 한국교회의 지나온 길을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한국교회 산 증인을 만났다. 어떤 지혜를 담고 있을까. 그에게 한국교회 나아갈 길을 물었다. ⓒ 송경호 기자 | |
올해 신년대담에서는 평양대부흥의 진원지인 장대현교회 전도사 출신으로, 올해로 99세를 맞은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 세계복음주의연맹(WEA) 회장으로 한국교회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이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증경총회장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업에 앞장서 온 이정익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대담=류재광 국장, 정리=김진영 기자, 사진=송경호 기자]
“자꾸 위기 위기 하는데, 한국교회 위기 아니야”
방지일 목사를 만나기 전,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갈지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이런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겠다는. 또 신선한 화두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컸다.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자 평양대부흥의 여운을 몸소 체험한 그를 만나는 모처럼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시작되고 문답이 오가면서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방 목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파릇한 젊은이들의 생각이 백발(白髮)의 세월을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로에게 교회의 갈 길을 물으려다 신앙의 도리를 배웠다. 다음은 방 목사와의 일문일답.
-목사님께서 태어나셨을 당시만 해도 복음화율이 높지 않았는데, 신앙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목사셨어.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지. 당시에는 교회도 많이 없었고, 유교의 영향도 강했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에 신앙을 키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어.”
-요즘 연말연시를 맞아서 교계 여러 모임에서 메시지를 전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는지요.
“속죄와 성령, 그리고 예수님.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해. 특히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지, 내가 예수님을 지배하면 안 되거든. 잘못하면 내가 (내 삶을) 주장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 주님께 투항해야 해. 무장해제. 투항했으면 무장을 해제해야지. 내 주관, 내 의견을 내려놓고 말이야.”
▲방지일 목사는 단호했다. 한국교회가 위기가 아니냐는 물음에, 한번에 “아니다”라고 했다. | |
-최근 한국교회 내에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에 대한 견해가 어떠신지요.
“위기라……. 반성하고 더 잘하자는 의미에서 그런 말 하는 게 나쁘진 않아. 하지만 위기가 아니야. 나는 중국에 21년 있었는데, 그 나라엔 자유가 없어. 마음놓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야. 그곳에 있다가 한국에 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교회 가서 찬양하고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아시아에서 한국만큼 복음화된 나라가 어디 있어. 왜 사람들이 자꾸 위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실제로 성장세가 둔화되고 한국교회 신뢰도 설문조사에서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교인수가 줄어든 건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래. 나는 아이 세 명 안낳을 거면 주례도 안 서준다고 그랬어. 그게 원인이야. 주일학교에 아이가 없잖아.
이미지라는 것도 그래. 이미지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한국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아질 수 있었겠어. 국회조찬기도회도 가보면 국회의원들 중에 장로가 12명이고 그 중에는 목사도 2명이나 있다고. 다만, 회장이나 대표 뽑을 때 선거운동을 많이 하고 서로 자기가 하려고 하는 걸 보면, 그런 부분은 좀 반성해야 될 것 같아. 양보하고 그래야지.
예전에는 길 기다가 열 사람 만나면 그 중에 여덟아홉 사람은 교회 나가는 거 찬성하고 그랬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그럴 뿐이지 절대 위기는 아니야. 교회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자꾸 위기라고 하는데, 위축될 필요 없어. 지금 교회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나는 공산치하에 있는 나라 있다가 여기 오니 정말 자유롭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
“예배는 거룩하게… ‘Again’이라는 단어 왜 썼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는데, 당시와 지금의 교회를 비교하신다면.
“평양에서 부흥회를 할 때는 인도하는 사람이 ‘통성기도는 자신의 말이 들릴락말락하게 하라’고 했어.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기도하라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커. 꼭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방해가 되니까 그냥 집에 가기도 하더라구. 예배 때 박수도 안 쳤어. 지금은 안 그렇잖아. 노래하고 박수치고. 세월이 바뀌고 그랬으니까 그게 꼭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하지만 예배는 좀 경건하게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예전에 연세대 교수 한 사람이 교회에서 성가 지휘를 하는데 목사가 그 와중에 옆 사람과 의논하는 걸 봤던 모양이야. 중간에 딱 멈추고는 야단을 쳤다는 거야. 지금 예배 중 아니냐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하고 있는 중에 어떻게 의논을 하느냐고.
어떤 사람은 막 흥분하고 그래. 흥분이 신앙은 아니거든. 술을 마셔도 흥분은 하잖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가슴을 치고 하는 그런 흥분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해야지. ‘오 주여’하면서 막 소리를 질러. 하나님 귀 안 먹었어. 하나님 못 들을까봐 그렇게 하나?”
▲방지일 목사 자택의 한쪽 벽에는 여러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중에는 빛바랜 흑백사진들도 많았는데, 한국교회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 송경호 기자 | |
-2007년은 평양대부흥 1백주년 행사로 한국교회가 분주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그 때를 평가해 주십시오.
“내가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많은 행사가 ‘Aga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데 참 잘못됐어. 다시 부흥해야 한다니, 그럼 평양대부흥 이후 지금까지 성령님은 쿨쿨 자고 계셨나? 지난날을 돌아봐봐. 예전에 나 중국에서 선교하다 한국에 왔을 때 성도 60만 운동, 100만 운동 하고 그랬거든. 지금은 예장 통합만 300만이야.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컸어. 그런데 다시라니. 우리가 다 하나님 은혜로 독립도 이루고 경제성장 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야?
(독립을 말하면서 방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 얘기도 꺼냈다. 그가 독립 후 대한민국 1차 국회를 기도로 시작했다고. 당시 기도문도 보여줬다. 대화는 평양대부흥에서 자연스레 독립운동 쪽으로 흘렀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기독교인이 많았어. 그 중에 길선주 목사님은 내 아버지 같은 분이야. 기독교인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나라의 독립하고는 사실 상관이 없지. 내가 이런 말 하면 그럼 역사를 무시하자는 말이냐며 발끈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목사로서 분명한 사명이 있다는 말이야. 길선주 목사님도 목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33인에 들어가신 거지.”
“북한에 줄 건 줘야… 늘 후회하고 실수하고 그래”
-최근에 남북관계 경색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이북이 고향이셔서 남북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은데,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정치적으로 할 말은 없고, 북한을 좀 돕긴 도와야지. 얼마전에도 북한에 폐결핵 약을 보낸다고 해서 설교한 일이 있는데…, 교회가 쌀도 많이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그거 보내봤자 가난한 사람들한테 안 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굶어죽는다는데 보낼 건 보내야해. 굳이 반대할 건 없어. 나는 국가재정의 1%를 북한을 돕는 데 쓰자는 입장이야. 미국 가면 목사가 북한 왜 돕느냐고 해. 북한이 그걸로 핵무기 만들 건데 왜 돕느냐는 거지. 그래도 어떡해, 옆에서 굶어죽어간다는데. 북한 돕는 사람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거야.”
▲한 평생 예수님을 믿으며 보람됐던 일도, 후회됐던 일도 많았다는 방 목사. 자신을 문초하는 사람 앞에서 “예수 믿느냐?”고 되물었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 송경호 기자 | |
-신앙의 여정이 기셨던 만큼 돌아보면 보람됐던 일도, 후회됐던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보람됐던 일이야 많지만, 중국에 있을 때 공산당에게 문초(問招)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할 말을 주신다고 하잖아. 나는 혼잔데, 저쪽은 100명 가까이 있고 두 명씩 나와서 문초를 해. 그 사람들이 철학, 역사, 심지어는 성경까지 읽고 와서 물어보거든. 그런데 신기하게 다 대답을 했어. 성경을 묻길래 내가 그랬지. 예수 믿느냐고. 허허.
그리고 내가 요즘 TV에도 출연하니까 30~40년 전에 알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럼 참 반갑고, 그 때 젊었던 사람들이 다 나이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 돼서 오면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느끼지. 그런게 보람돼.
후회라면 매일 후회하고, 실수하고 그래. 하나님께 온전히 다 맡기고 살아야 하는데 내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할 때가 있거든. 예배 드릴 때 순서가 잘못되진 않았나, 설교 할 때도 내 생각이 개입돼서 좀 재미있게 해보자는 꾀를 내진 않았나 돌아보지. 날마다 그러면서 살아.”
“늘 새해처럼 살아라… 내 목회경험이 때론 시험”
-새해가 밝았습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한 말씀 하신다면.
“새해라고 해서 별 게 있나. 달력이 바뀌니까 새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새해처럼 살아야 해. 언제나 주 안에서, 날마다 새 피조물이 돼서 그렇게 말이야. 내가 온전히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사는 거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걸 알아야 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려고 해도 죄 때문에 못 가거든. 이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거야. 복음, 이걸 알아서 전하는 사람이 목사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건 직장에 취직한 거지 목사가 된 게 아니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게 있어. 그 대작곡가가 완결하지 않았다는 거야. 인생이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뛰었던 사도처럼 말이야. 항상 그렇게 살려고 해. 때론 내 목회경험이 마귀처럼 시험처럼 느껴져. 그것에 자족하고 살까봐. 늘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방 목사는 지팡이를 짚는다. 그래도 걸을 때면 휘청휘청한다. 대화 중에도 몇 번이나 손바닥을 귀에 댔다. 그러면 어김없이 큰 소리로 질문을 다시 해야 했다. 그렇게 노쇠한 그였지만 그만큼 신앙의 연륜도 느껴졌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신앙의 진수(眞髓)가 묻어났다. 대담이 끝났을 때 방 목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대접한 게 별로 없다며 미안해 했다. 많이 느끼고 배웠다 했더니, 손자뻘 되는 기자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서는데 자꾸만 아쉬웠다. 그의 신앙을 글로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일까.
방지일 목사는
1911년 5월 21일 평북 선천 출생. 1933년 평양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7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같은해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 목사 안수(퍙양노회)를 받은 방 목사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돼 21년간 사역했다. 1958년 영등포교회 부임 후 예장 통합 한남노회장, 경기노회장을 거쳐 제56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이자 장로교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로 있으며 숭실인상 추양목회대상,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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