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 선교사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4세, 존 언더우드와 로렐 언더우드를 제 218차 PCUSA 총회가 열리고 있는 산호세에서 만났다.
선한 눈매와 서글한 인상이 매력적인 존과 로렐은 지난 21일 총회가 있기 전 대성장로교회에서 열린 한인목회자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존 언더우드는 “이 자리에 초대되어 큰 영광"이라고 밝히며, “1885년 고조할아버지가 밟은 미지의 한국이 이제는 전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 너무 큰 영광이며 이 같은 한국 목회자의 모임이 너무나 보기 좋다”고 참석 소감을 전했다.
24일 총회에서 다시 만난 존 언더우드의 동생, 로렐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갈 때 마다 마치 고향에 가는 것 같다”며, “워낙 다민족 문화에서 자라서 그런지 인종간의 꺼리낌은 전혀 없다. 다만, 무엇이 진정한 가치관(복음)인지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더우드(1859-1916, Horace G. Underwood)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고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881년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뉴 브른스윅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했다.
언더우드는 신학재학 시절부터 인도 선교를 지망하고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소식을 접한 이후 언더우드는 “너 자신은 못 가느냐?” 라는 응답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은 후 언더우드 가문은 4대에 걸쳐, 총 120년 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짓고 새문안교회를 세웠으며, 민족의 일꾼을 키우기 위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와 대표적 기독교선교단체 YMCA를 세우는 등 한국교계 뿐 아니라 교육 및 복지에도 기여했다. 지난 2004년 언더우드 가문은 "이 나라를 향한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며 모든 것을 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선한 눈매와 서글한 인상이 매력적인 존과 로렐은 지난 21일 총회가 있기 전 대성장로교회에서 열린 한인목회자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존 언더우드는 “이 자리에 초대되어 큰 영광"이라고 밝히며, “1885년 고조할아버지가 밟은 미지의 한국이 이제는 전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 너무 큰 영광이며 이 같은 한국 목회자의 모임이 너무나 보기 좋다”고 참석 소감을 전했다.
24일 총회에서 다시 만난 존 언더우드의 동생, 로렐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갈 때 마다 마치 고향에 가는 것 같다”며, “워낙 다민족 문화에서 자라서 그런지 인종간의 꺼리낌은 전혀 없다. 다만, 무엇이 진정한 가치관(복음)인지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더우드(1859-1916, Horace G. Underwood)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고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881년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뉴 브른스윅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했다.
언더우드는 신학재학 시절부터 인도 선교를 지망하고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소식을 접한 이후 언더우드는 “너 자신은 못 가느냐?” 라는 응답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은 후 언더우드 가문은 4대에 걸쳐, 총 120년 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짓고 새문안교회를 세웠으며, 민족의 일꾼을 키우기 위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와 대표적 기독교선교단체 YMCA를 세우는 등 한국교계 뿐 아니라 교육 및 복지에도 기여했다. 지난 2004년 언더우드 가문은 "이 나라를 향한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며 모든 것을 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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