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 체제의 흔적과 이슬람 문화권의 특성이 함께 남아 있는 지역이다. 소련 해체와 각국의 독립을 거치며 한때 종교 활동의 공간이 넓어졌지만, 이후 국가별로 종교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면서 교회 개척과 복음 전파에도 적지 않은 제약이 뒤따랐다.
이러한 중앙아시아 선교의 격변기를 현장에서 지나온 이가 김삼성 선교사다. 김 선교사는 1990년 카자흐스탄에 들어간 이후 고려인과 현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과 제자훈련을 통해 현지 지도자와 교회 개척자를 세우는 사역을 이어왔다. 대규모 집회가 열리던 시기도 있었고 현지 당국의 감시로 사역이 크게 위축되는 때도 있었지만, 그의 사역 중심에는 줄곧 사람을 말씀으로 세워 현지 교회를 일으킨다는 방향이 자리해 왔다.
본지는 김 선교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카자흐스탄에서 시작된 교회 개척과 중앙아시아 복음화 사역의 과정, 그리고 수십 년의 선교 현장에서 경험한 교회와 제자훈련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알마티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된 중앙아시아 선교

김 선교사가 처음 카자흐스탄에 들어간 것은 1990년 12월이었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선교지로 나갈 길을 찾던 그는 당시 김광신 목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바라보게 됐다.
“당시 그 지역에는 한인 선교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문을 여시는 지역에 누가 먼저 부르심에 응답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사역을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나 충분한 준비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갖춘 뒤 떠난 것이 아니라 먼저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필요한 것들이 채워졌다고 돌아봤다.
“제가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솜씨가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선교 훈련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첫 번째로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 사람은 모이십시오”라고 했더니 고려인 몇 명이 찾아왔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한국어로 복음을 전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현지인들이 통역을 맡았다.
그러던 중 한 젊은 여성이 기도를 받게 됐다. 20년 동안 뇌전증으로 고통받으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약을 복용해야 했던 여성이었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중 이 여성은 쓰러졌다가 일어난 뒤 몸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 했고, 다음 주에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이 일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치유에서 말씀으로
당시 카자흐스탄은 소련 체제가 무너지던 전환기에 있었다. 사회를 통제하던 체계가 흔들리면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신비주의 등 여러 사회적·영적 문제가 나타났다. 교회 안에서도 정신적·영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김 선교사는 한동안 치유와 축사 사역을 병행했다. 금요철야 때 별도의 사역팀을 만들어 기도했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에 관한 말씀도 가르쳤다.
그러나 1년 정도 지나면서 이전에 기도를 받았던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안고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생겼다. 그에게는 사역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스스로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가 단순히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스스로 믿음을 세워갈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때부터 성경 교육에 더욱 집중했다. 처음에는 20여 명이 모여 3~4시간씩 공부했다. 일주일에 세 차례, 3개월 동안 한 주제를 정해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성경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이 인간의 영·혼·육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를 중심으로 교회 전체를 세우는 교육 과정으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성경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수년 동안 약 2천 명에 이르렀다.
청년을 교회 개척자로...실크로드 청년 페스티벌
말씀으로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자연스럽게 교회 개척으로 이어졌다.
2000년 무렵 김 선교사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청년들을 교회 개척자로 세우기 위한 ‘실크로드 청년 페스티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마티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행사를 열었고, 이후 교회 개척을 원하는 청년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라칼팍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뿐 아니라 중국 신장과 몽골에서도 참가자들이 찾아왔다.
2007년 무렵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만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를 위해 국경을 넘어왔다. 국경에서 제지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 선교사가 그렸던 것은 중앙아시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길목마다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들이 그 교회를 직접 이끌어 가는 구조였다. 대규모 행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교회를 세울 사람을 발굴하고 훈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약 500명의 교회 개척자를 세워 파송했다.
카자흐스탄 당국의 감시와 압박

그러나 페스티벌의 규모가 커지고 국경을 넘어 참가자들이 모이면서 현지 당국의 감시도 심해졌다. 미국과 연계된 활동이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교회와 사역자들이 조사를 받고, 사무실과 교인들까지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페스티벌은 2006~2007년 무렵 중단됐다.
대규모 집회는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 사람을 말씀으로 세우는 데 집중해 온 제자화 사역은 교회를 지탱하는 기반이 됐다.
“처음부터 제자화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계속 양육했습니다.”
김 선교사는 외부의 압박으로 대규모 모임은 중단됐지만, 그동안 말씀으로 양육된 성도와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30여 년 선교의 출발점은 ‘첫 번째 순종’
김 선교사가 선교 초기부터 붙들었던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이었다. 중앙아시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역도 결국 이 말씀에서 출발했다.
“처음부터 제 마음속에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이후 예루살렘의 유니버시티 오브 홀리랜드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6~7년간 가르쳤고, 다시 터키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현재까지도 중앙아시아에서 사역자들을 세우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30여 년의 선교 여정을 돌아보면서 그가 다시 강조한 것은 거창한 준비나 자신의 역량보다 부르심 앞에서의 ‘첫 번째 순종’이었다.
“새로운 땅의 문이 열릴 때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사역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