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마음이 무겁다.
돋보기의 도수를 한 단계 더 높였다.
2006년, DTS 예수전도단에서 요한복음 묵상으로 시작한 새벽이 어느덧 스무 해째다.
나는 매일 새벽,
다른 일을 먼저 하지 않는다.
세 시간을 먼저 떼어놓는다.
두 시간은 묵상한다.
한 시간은 필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도로 하루를 닫는다.
졸음이 쏟아지는 날도 있었고,
몸이 아픈 날도 있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앉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말씀을 뒤로 미룬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더 먼저 말씀 앞에 앉았다.
성경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해 녹음했고,
필사했다.
그렇게 스무 해가 흘렀다.
오늘 책상 위의 돋보기를 정리하다
다 쓴 볼펜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스무 해 동안
볼펜심을 몇 개나 썼을까.
모아둔 적은 없다.
다 쓰면 버리고, 또 꺼내 썼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다 쓴 것만 모아놓아도
이만큼이다.
볼펜 하나를 쉽게 버리지 않는 것도
내 오래된 습관이다.
집 안에 있는 볼펜들을 하나씩 꺼내 쓴다.
잉크가 남아 있는 한 버리지 않는다.
끝까지 쓴다.
끝까지 쓰고 나서야 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 볼펜심들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작은 심들은
자기 안에 남은 것을 끝까지 밀어내고
자기 몫의 시간을 다 쓰고 나서야
비로소 버려졌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 생겼다.
나는 스무 해 동안 말씀을 어떻게 써왔을까.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안다.
얼마나 오래 앉았는지도 안다.
그런데
얼마나 변했는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잠언 12장을 읽는다.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가 마주 서고,
분노하는 자와 수욕을 참는 자가 마주 서고,
거짓과 진실이 마주 선다.
처음에는 그 대조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오래 읽다 보면
그 얼굴이 내 쪽으로 돌아선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
분노를 쉽게 드러내는 사람.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베는 사람.
거짓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
게으름을 핑계 삼는 사람.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다.
내 이름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남을 판단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래서 말씀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때로는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생각했던 나와
말씀 앞에 드러난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피하고 싶지는 않다.
그곳에서 내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그러니 오늘
오늘의 말씀 앞에서 결정해야 한다.
읽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오늘 한 가지라도 바꿀 것인가.
세상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걱정은 목을 조이듯 밀려오고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의 일을 걱정하기 전에
오늘 새벽 세 시간을 말씀 앞에 내어놓는다.
이 세 시간은
내 삶에서 남는 시간에 붙여놓은 시간이 아니다.
가장 먼저 떼어놓은 시간이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말씀을 읽고,
쓰고,
기도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스무 해를 읽었다면
많이 변해도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다 쓴 것은 볼펜심뿐인지도 모른다.
돋보기의 도수는 올라갔다.
세상을 보는 눈은 더 선명해졌는데
정작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조금 슬픈 일이다.
나는 이제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말씀 때문에 달라진 사람으로 남고 싶다.
버려진 볼펜심을 다시 바라본다.
뿌듯하다.
이 작은 것들이
내가 보낸 새벽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볼펜심들이
내 묵상의 마지막 증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증거는
내 삶이어야 한다.
말 한마디가 달라지고,
화를 내는 시간이 늦어지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때로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20년의 결과다.
그래서 내일도
다음 장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 시간을 내어놓을 것이다.
두 시간 묵상하고,
한 시간 필사하고,
마지막에는 기도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겠다.
읽었으면 살아내겠다.
스무 해를 읽었다면
스무 해만큼 달라지도록.
오늘도 말씀 앞에 앉는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를 바꾸어 달라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서정희 전도사 약력]
현직: TBD건축 디자인그룹 공동대표, 방송인, 작가
경력: 국제대학 산업디자인 초빙교수 역임
주요 저서: 『서정희의 자연주의 살림법』(1998), 『서정희의 집』(2002), 『서정희의 주님』(2008), 『쉬이즈 앳 홈』(2010), 『정희』(2017), 『혼자 사니 좋다』(2020), 『살아있길 잘했어』(2024)
SNS 계정: 인스타그램 @junghee_suh / 오디오바이블 @junghee_audiobible / 도서계정 @with_thebook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