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마테라 목사.
 조셉 마테라 목사.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셉 마테라 목사의 기고글인 '은사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은사중지론자일 수 있는 7가지 신호'[7 signs you're a cessationist (even if you're charismatic)[을 9월 4일 게재했다.  

마테라 목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컨설턴트,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사도 지도자 연합(The U.S. Coalition of Apostolic Leaders), 그리스도 언약 연합(Christ Covenant Coalition) 등 여러 단체를 이끌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여기서 말하는 '은사중지론(cessationism)'이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사역의 직분과 성령의 나타나심이 오늘날의 교회 시대에는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고 보는 신학적 입장이나 실제적 태도를 가리킨다(엡 4:11; 고전 12:4-11). 

오순절파와 은사주의(Charismatic) 진영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으며,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이를 '계시', '조명', '감동'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한다. 반면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이러한 초자연적 사역의 지속성을 부정하는 비은사주의적 복음주의자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자신을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라고 부르더라도, 실제 삶과 교회 사역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와 성령의 은사를 거의 믿지도, 실천하지도, 경험하지도 않는다면 사실상 '기능적 은사중지론자(functional cessationist)'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복음주의적 합리주의자'란 성경의 핵심 진리와 초자연적 사건들은 믿으면서도,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특정한 사역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은 부정하는 이들을 뜻한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 요소가 인간의 이성과 이해라는 틀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사고가 작동하면서, 신앙에서 '신비'의 영역을 지나치게 축소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반초자연적인 세계관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인 부활이 있으며, 신자는 거듭남이라는 영적 현실을 믿고 경험하기 때문이다(롬 10:9-10). 또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초자연적으로 사역하신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사역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거의 기대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경우다. 다음은 신앙과 교회 안에 숨어 있을 수 있는 '기능적 은사중지론'을 보여주는 일곱 가지 모습이다. 

1. 에베소서 4장 11절의 사역 직분을 사실상 중지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교단이 은사주의를 표방하는지 여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베소서 4장 11절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양한 사역의 기능을 언급한다. 

어떤 개인이나 교회가 이 가운데 일부 직분이나 기능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면, 적어도 사역 직분의 영역에서는 은사중지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은 명칭 자체가 아니라 기능이다. 오늘날 교회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다양한 사역적 은사와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2.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사실상 부정한다 

기록된 성경 말씀 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개인의 마음에 특정한 감동이나 인도하심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부정한다면, 이 영역에서는 은사중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조명'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고 표현하며, 또 다른 이는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용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핵심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성령을 통해 개인적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일부 복음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말씀을 성경 정경의 완성과 연결해 해석한다. 따라서 누군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 완성된 성경에 새로운 계시를 추가하려는 것처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하며(고전 13:12), 지금의 부분적인 지식과 이후의 온전한 앎을 대조한다. 따라서 이 본문을 정경 완성만으로 제한해 이해하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한 같은 문맥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뿐 아니라 '지식'도 폐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단순히 정경 완성 이후 특정 은사만 중단되는 것으로 읽는 것이 과연 문맥 전체를 충분히 반영하는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예언을 교리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예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가르치며, 성도들이 예언하는 상황도 묘사한다(고전 14:4, 29-31). 

그러나 교리적으로만 예언을 인정하면서 실제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는 이를 전혀 기대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예언의 영역에서는 기능적으로 은사중지론적인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분별과 질서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다. 은사를 인정한다는 고백과 실제로 그것을 위한 공간을 허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4. 방언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필자는 여러 오순절 교단 지도자들로부터 오늘날 젊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가운데 개인적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을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로 설명한다(고전 14:2-4). 따라서 스스로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라고 부르면서도 방언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방언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은사중지론적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셈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신자가 반드시 동일한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해당 은사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교회 전체가 그것을 사실상 금기시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다. 

5. 신유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병자를 위해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다 

복음서와 신약성경에는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수님의 사역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병자를 위한 기도와 치유의 역사가 기록돼 있다(눅 10:1-9; 약 5:13-15; 행전의 여러 기록 참조). 

그럼에도 오늘날 일부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조차 병든 사람을 위해 실제로 치유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일 수 있다. 

신유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사역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면, 이 영역에서는 기능적 은사중지론에 가까워질 수 있다. 

물론 모든 치유 기도가 즉각적인 육체적 회복으로 이어진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이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면,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6. 귀신 축출 사역을 사실상 특정 전문가에게만 맡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고, 제자들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했다(눅 10:17-20). 야고보서 역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한다(약 4:7). 

그럼에도 많은 오순절·은사주의 기독교인들은 귀신 축출이나 이른바 '축사(deliverance)' 사역을 매우 불편하게 여기거나, 일부 특별한 사역자들만 담당해야 하는 영역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관점에서 이 사역은 무분별하거나 선정적으로 다뤄져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교회 밖으로 밀려나서도 안 된다. 필요할 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권위 안에서 악한 영을 대적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귀신 축출과 영적 대적이라는 성경적 개념 자체를 사실상 배제한다면, 이 부분에서도 기능적 은사중지론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 

7. 성경 해석에서 성령의 현재적 조명을 사실상 배제한다  

필자는 영감된 성경 본문에서 저자의 본래 의도를 발견하도록 돕는 역사적·문법적 해석 방법을 철저하게 훈련받았다. 이러한 해석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학문적 방법론만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고 삶에 적용하도록 조명하시는 역할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26). 요한일서 역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신자들을 가르친다고 말한다(요일 2:27). 

따라서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충실히 사용하면서도 성령의 현재적 조명과 인도하심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면, 해석학의 영역에서 기능적 은사중지론에 빠질 수 있다. 

성령의 조명은 본문의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거나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내는 허가증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진리를 현재의 삶 속에 깊이 적용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 주제를 더 연구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크레이그 키너(Craig Keener)의 『성령의 해석학(Spirit Hermeneutics)』과 필자의 『나의 해석학(My Hermeneutic)』을 참고할 만하다. 

교단의 이름보다 실제 신앙이 중요하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특정 교단을 비판하거나 누군가에게 '진짜 은사주의자'라는 자격증을 부여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신학적 이름 아래 서 있든, 모든 성도가 자신의 신앙생활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실제로 기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도록 돕는 데 있다. 

오순절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령의 은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특정한 은사주의적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을 서로 경쟁시키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영감하신 말씀과 모순되게 역사하지 않으시며, 말씀 역시 성령의 역사와 분리된 채 단순한 정보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필자가 바라는 것은 모든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이 자신의 삶과 교회를 통해 온전히 나타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교회의 목표는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분의 현재적 역사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