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분담과 전문화

그동안 전주(1896-1904), 군산(1904-1908), 목포(1909-1912) 등 세 지부에서 사역하며 스테이션 조성사업을 완수해 각 지부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흔치 않은 과제들을 완수했던 하위렴 선교사에게 다시 한번 군산지부의 책임이 맡겨지고 있었다.

부임 당시(1915) 군산지부에는 이미 스테이션 조성이 마무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위렴은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지부의 전체 사역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위렴은 먼저 복음, 의료, 교육 등 3개 사역 외에 아예 여성 사역을 따로 떼어 네 분야로 나누고, 분야마다 새로운 인원을 보강해 전문적인 팀 사역을 추진했다.

1917년 당시 사역 분담을 보면 복음 사역은 하위렴, 부위렴, 매요한 등 세 선교사가 맡았고, 의료 사역은 패터슨Jacob B. Patterson과 간호사 래스롭Lillie O. Lathrop이, 학원 사역은 남학교에 인돈William A. Linton과 여학교는 엘비Libbie A. Alby와 순천 선교지부에서 전임해온 듀피Lavalette Dupuy가 맡았으며 여성 사역은 다이샤트Julia Dysart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해 남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던 베너블(William A. Venable) 선교사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떠났으나 다행스럽게도 인돈 선교사가 충원되면서 그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이처럼 우수한 자질과 열정을 가진 선교사들이 잇달아 부임해 오면서 군산지부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매요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 연례회의(1916)에 하위렴 선교사 부부의 귀환과 함께 군산 선교지부의 사역이 크게 활성화되어 가고 있음을 서면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 복음 사역

당시 군산지부에서 관할하는 순회지역의 전체적인 인구는 대략 336,000명 정도였다. 하위렴은 군산으로 복귀하면서 사역의 전문화를 통해 스테이션의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복음 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순회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위렴은 순회 구역을 조정해 동부와 남부 그리고 북부 등 3개의 시찰로 나누고, 자신을 포함해 부위렴William F. Bull과 매요한John McEachern 등 3명의 선교사가 각각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순회 사역을 돕는 선교부 소속의 조사 3명과 7명의 조선인 유급 조사 그리고 3명의 권서인을 따로 두었다.

3개 시찰 포함해 순회지역 전체에 교회가 62개, 그리고 세례 교인이 1700명, 학습 교인이 257명이 등록되어 있었으며, 믿음을 고백한 자는 따로 계수해 93명이 있었고, 그해 유아 세례자는 43명이었다. 시험을 통과해 이미 장로로 세워진 자가 한 사람이 있었으며, 한 사람은 피택이 된 상태였다. 우선 하위렴 자신이 맡은 동부 시찰만 해도 373명의 세례교인과 138명의 학습교인을 포함한 17개 교회와 2개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교회는 그 후로 하나가 더 늘어 18개나 되었다.

혼자서 17~18여 개의 교회를 한 해 52주 동안 나누어 빠짐없이 순회한다고 쳐도 교회별 방문횟수는 일 년에 겨우 2번에서 많아야 3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현실 없었다. 선교사들은 순회할 때마다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풀고, 헌금관리를 감독하고, 나아가 교회 생활에 잘못을 있을 때는 교정해 주기도 하면서, 마치 허물어진 농장에 울타리를 다시 두르고 풀을 뽑아 북을 돋우며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처럼 힘을 다해 교인들을 가르치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렇게 순회 횟수가 적고 지원이 부족한 현실임에도 한 여성의 리더십 아래 교회 성장을 이뤄낸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시력이 거의 맹인에 가까울 정도였던 한 여성의 리더십 아래 2년 동안 교인이 4배가 증가했는데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었음에도 교회 증축을 해낼 만큼 급성장을 이뤘다. 그해 16명이 세례 문답을 통과했는데 놀랍게도 그중 6명은 47~70세 사이의 과부들로 문맹이었다. 학습 교인으로 47명이 등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 거의 200여 명이나 되는데도 한 사람의 결석자가 없이 매주 예배에 참석했으며 만일 한 사람이라도 주일예배에 빠지면 누군가는 그를 찾아가 결석의 이유를 묻고 권면해 반드시 다음 주에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끌어내기도 했다."

한편 주일학교에 대해서는 선교부 차원에서 지속적인 강조를 해와서 그런지 교회마다 대체적으로 주일학교 조직을 잘 운용하고 있었고,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곳도 있었다.

하위렴의 순회 구역 가운데 이미 5개의 교회부설 학교가 세워지면서 학생 수가 90여 명에 달해 내심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공교육이 무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다 교회부설 학교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점차 심해지고 있어 기독교 교육의 정체성이 약화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기도 했다.

• 의료 사역

내한 선교 초기부터 의료 사역이 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데다 하위렴 자신이 과거 의료선교사로 사역을 해본 적이 있어 누구보다도 진료를 통한 선교 효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병원 운영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원활한 의료 사역을 위해 현지 간호사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파악하고 간호 선교사였던 아내 에드먼즈와 함께 간호사 양성에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마침 패터슨 박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광주에서 사역하던 쉐핑E. J. Shepping 선교사가 군산에 올라와 구암병원에서 잠시 사역을 했는데, 이때부터 그녀가 1917년 세브란스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3년 정도를 에드먼즈와 함께 간호사 소양 교육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간호사들에게 일본어, 중국어, 영어, 의약품 개론, 간호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심리학 등을 나누어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이렇게 교육받은 간호사들의 자질과 능률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향상된 것에 대해 하위렴은 쉐핑의 역할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는데, 이듬해 쉐핑은 세브란스로 옮겨가면서 군산에서 가르쳤던 두 명의 학생을 그곳에 데려가 공부시키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구암병원에서 6년 이상을 일했던 조수 정 씨도 언급하면서 그는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절반 이상을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놀람을 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구암병원이 더욱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며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한편 전쟁으로 의약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르며 품귀 사태까지 빚어지자 의약품 확보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전쟁으로 의약품이 품귀되어 약값이 놀랄 만치 올랐으나 아직 까지는 그런대로 필요한 만큼의 재고가 있었기 때문에 견딜 만했다. 전쟁 전에 2불에 거래되던 것이 지금은 25불에 거래되고 있다."

• 교육 사역

1916년 당시 군산지부에 소속된 교육기관으로는 일단 선교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소학교와 남녀 고등보통학교 과정이 있었고, 지역교회에 부설되어 있던 12개의 남자 소학교가 있었다.

"그해 소학교에는 200명의 어린이가 재적하고 있었고, 여학교에는 62명의 학생과 5명의 선생이 그리고 남학교에는 74명의 학생과 7명의 선생이 있었다."

미션스쿨이라고 해서 자체적인 교과과정은 일절 허락되지 않았고, 반드시 당국에서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라야 했다. 다만 기독교 수업 같은 종교교육은 별도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 원칙이 지켜지는 한 수업이나 학사學事 과정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한가지 흠이라면 미션스쿨은 졸업 시 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학력 시험을 통과해야 총독부 인정의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해마다 학교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점차 다가가고 있었다. 졸업생 6명 가운데 2명이 총독부 학력 인정 졸업장을 받았고, 다른 4명 가운데 3명은 안타깝게도 한 과목에서 과락이 있었다. 그 과목만 합격하면 그들 역시 총독부 학력 인정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위렴은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학생들에게 세 가지 영성 훈련을 추진했다. 그것은 YMCA 활동 참여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 그리고 제주도 선교여행을 통한 현지 전도 훈련 프로그램 등이었다.

"첫째는 70명의 회원을 가진 YMCA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 2시간씩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둘째는 남학생들이 4개의 주일학교 확장프로그램에 봉사하는 일과 셋째로는 학교에서 경비를 대는 졸업 여행으로 한 달 동안 제주도를 돌며 전도 훈련을 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한편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과 수업을 통해 보조 신청을 받아야만 하는 남학생이 다른 어느 해보다도 많아 25명이나 되었지만, 자랑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는 실과 수업 중에 만든 학생의 공예작품 가운데 '찬합饌盒' 1점과 '서가書架' 2점이 경성에서 열리는 전람회에 출품되어 총독부로부터 상을 받은 일이었다.

여학교는 1916년 한 학기 동안은 다이샤트 선교사가 지도했는데, 순천지부에서 듀피 선교사 가 부임해 오면서 다이샤트는 다시 여성 사역을 맡았다. 여학교에는 듀피 외에 쉐핑과 에드먼즈가 합동으로 주당 14시간을 맡아 가르쳤으며 에드먼즈는 교과 이외에도 여학생에게 필요한 과외활동을 지도하기도 했다.

"에드먼즈가 지도한 수예부에는 여학생이 25명이나 될 정도로 서양자수의 인기가 많았다. 그들이 만든 작품을 판매한 수익금은 91엔이나 되어 들어간 경비를 제하고도 25엔 정도가 남아 수예부의 운용 경비에 보태기도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그해(1916)에 있었던 세 분야의 사역을 보고하면서 조선교회의 보랏빛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으나 일제의 수탈로 주민들의 삶이 점점 더 비참해져 가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교인들을 위로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교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헌신은 한국교회의 장래를 기대해 볼 만 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추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교인들이 견뎌내야 했던 시험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중략) 더 많은 양의 쌀이 생산될수록 가난한 농민들의 식생활은 점점 더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사 선교사들의 손길이 내년에 감소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교인들의 열성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는 더 큰 결과들을 이루리라 기대해 봅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