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신학대학원 달라스분교 하숙자 디렉터, 목회분과 겸임교수
(Photo : ) 센트럴신학대학원 달라스분교 하숙자 디렉터, 목회분과 겸임교수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는 소인국에서는 거대한 존재로 추앙받지만, 대인국에서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사실 달라진 것은 걸리버 자신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과 비교의 기준이었습니다. 이 극명한 대비는 인간 자아의 상대성과 불안정성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과 환경에 따라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반대로 과소평가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아는 왜 이처럼 쉽게 흔들리고 불안정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인간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에, 외적인 인정과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적 자아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기준과 욕망에 따라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집니다. 마치 소인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 안에서 걸리버를 영웅처럼 떠받들고, 반대로 대인국 사람들이 그를 하찮은 존재로 여겼던 것처럼, 인간 역시 비교의 틀 속에서 타인의 가치를 평가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결국 갈등의 근원은 외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자아의 공허와 지나친 자기몰입에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시각이 굳어지면 상대의 패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정하려 하거나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비교 중심의 자아는 결국 자신을 타인보다 높이려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C. S. Lewis는 이 교만의 핵심이 바로 ‘경쟁심’에 있다고 지적합니다.[1] 그래서 교만한 자아는 단순한 소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타인보다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고자 하며, 비교 우위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려 합니다.

소인국에서 걸리버가 압도적인 존재로 여겨졌던 모습은 인간 자아의 상대성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의 자아는 비교 우위에 놓이는 순간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크게 느끼고 쉽게 팽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 팽창이 바로 우월감입니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묻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어디서 오는가? 팀 켈러 목사는 열등감 역시 교만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낮게 여기는 열등감이 어떻게 교만과 연결된다는 것일까요? 그 메커니즘은 이렇습니다. 비교를 통해 우쭐해진 자아는 언제나 조건적 우월감 위에 서 있습니다. 자신보다 약하거나 낮다고 여겨지는 상대 앞에서는 스스로를 크게 느끼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곧바로 위축됩니다. 마치 걸리버가 소인국에서는 거인이었지만 대인국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던 것처럼, 비교 우위를 잃는 순간 자아는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너짐이 열등감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등감은 우월감의 정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월감을 유지하려던 시도가 실패했을 때 드러나는 또 다른 얼굴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먼저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그 비교에서 밀리는 순간 감추어져 있던 공허함이 열등감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옵니다. 결국 우월감과 열등감은 서로 다른 감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열매입니다. 둘 다 ‘비교라는 거울 앞에 선 자아’가 만들어 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울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 인간의 자아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우쭐해졌다가 움츠러드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비교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부르심대로 살아가야 함’ [2] 을 강조합니다. 결국 비교는 자아를 끊임없이 흔들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부르심 안에 거하는 사람은 더 이상 타인과의 우열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을 과장할 필요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어진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가며, 비교가 아닌 은혜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바울 또한 교만을 나타내기 위해 통상적으로 쓰이는 말인 휴브리스(hubris)[3]가 아닌 푸시우 (phusioō ) [4]를 씁니다. 푸시우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 팽창, 즉 안에서 바람이 가득 차오르듯 자아가 부풀어 오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국어로는 ‘바람이 한껏 들었다’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풍선이 바람을 가득 품을수록 팽팽하게 부풀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듯이, 푸시우의 자아 역시 겉으로는 우쭐하게 부풀어 있으나 정작 그 중심은 비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5]

이러한 교만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고, 그 거리만큼 내면의 고통은 깊어집니다. 자신을 부풀릴수록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는 좁아지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큰 인정을 갈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신성을 발견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영적 ‘수고’를 치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의 난관에 봉착했을 때 전문가를 찾아 해결의 답을 찾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며 전력투구하듯, “왜 이토록 우리의 내면이 곤고한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Two islands floating in the air are connected by a stone bridge.( Illustration by Freepik)
(Photo : ) Two islands floating in the air are connected by a stone bridge.( Illustration by Freepik)

삽화 설명: 서로 다른 색과 형태를 지닌 두 섬이 각자의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각기 다른 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 가운데 공존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시대와 환경은 변천하나 인간 본성의 기저는 불변합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인간 자아의 실존적 상태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곧 인간의 자아는 공허함과 고통, 분주함과 연약함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6] 각각을 좀 더 풀어보면, ‘공허함’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아의 중심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고, ‘고통’은 그 빈 자아를 채우려 끊임없이 인정과 비교를 추구하기에 항상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말합니다. ‘분주함’은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비교와 자랑으로 쉬지 못하고 달려가는 모습이며, ‘연약함’은 그 모든 시도가 결국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 네 가지는 별개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자아가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하나의 연결된 흐름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인간의 원죄적 상처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고통’입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러한 고통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하는 상태’에서 찾았습니다. 곧 인간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입할수록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더욱 민감해지고, 그 결과 내면의 갈등과 고통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존적 갈등은 자기 함몰적 시선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 것입니다.[7]

팀 켈러가 설명하는 ‘자아의 고통’은 일상 속 비유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건강한 신체 부위를 평소 특별히 의식하지 않듯, 건강한 자아 역시 자신에게 과도하게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아는 타인의 사소한 말과 반응에도 쉽게 흔들리며,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려 합니다. 결국 이러한 상태는 내면의 깊은 상처와 고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8] 바울은 인간의 시선이나 자기 판단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를 보여 줍니다. 즉 인간의 실존적 고통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중하는 삶에서 비롯되며, 성경은 이러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시선으로 나아갈 때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구안와사(안면마비) 를 겪으며 ‘자기 망각(Self-forgetfulness)’의 역설적 진리를 신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왼쪽 안면 근육이 마비되자, 음식을 입 중앙으로 모아 자연스레 식도로 넘기는 ‘연하 작용’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근육이 강건할 때는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기능이 상실되자 그 존재를 고통스럽게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망각이란 자신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켈러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복음적 겸손의 핵심은 자신을 더 생각하거나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덜 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타인을 향해 시선이 옮겨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아가 배경으로 물러나, 온전히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건강함도 이와 동일한 원리를 따릅니다. 신체 근육이 완벽하게 기능할 때 ‘무의식적 기능’ 상태가 되어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듯, 건강한 자아는 자신의 감정이나 반응에 과하게 매몰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아프다’는 것은 곧 자아가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빈 공간을 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채울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자기 망각’의 은총, 즉 참된 강건함에 이르게 됩니다.

자폐 성향이 있는 저의 자녀를 키우며 제가 도달한 신정론적 결론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자녀는 학업을 완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엿한 직장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제 제 손을 떠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는 자녀를 보며, 저는 누군가 내 아이의 약점을 품어주고 고유한 강점을 존중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동시에 “하나님도 역시 공짜가 없으시네”라는 우스갯소리 섞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그 존중과 자비의 무게만큼, 나 또한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공평함의 원리’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 하기보다 그가 가진 ‘나라’의 국경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임을 깨달아 갑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기대하는 공평한 시선을 나 스스로 먼저 실천하는 삶, 그것이 바로 갈등관계를 줄이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라는 협소한 감옥에서 출옥하여 타인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세상을 이길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나를 잊는 그 자유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진 진짜 우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이미 최종 판결을 선언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9] 이 판결은 우리의 행위 이전에, 비교 이전에, 성취 이전에 이미 내려진 것입니다. 오늘도 그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되뇌며, 나를 증명하려는 분주함을 내려놓고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의 지평으로 나아갑니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입니다.

각주
[1]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1), 3부 8장 「가장 큰 죄」.
[2] 고전 7:17
[3] 휴브리스(hubris)는 그리스어로 '도를 넘는 교만 혹은 자만심'을 뜻함. 단순히 마음속으로 우월감을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모욕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적 발현에 초점.
[4] 팀 켈러.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서울: 두란노, 2013.
[5] Ibid.
[6] Ibid.
[7] Ibid.
[8] 고전 4:3
[9] 막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