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무신론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자기 파괴 속에서 서서히 잉태되었다. 1914년, 기독교 문명을 자처하던 유럽의 열강들이 참호 속에서 서로를 학살하기 시작했을 때,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철학의 언어에서 역사의 현실로 내려앉았다. 전쟁이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수백만의 주검과, 신을 향한 뿌리 깊은 회의였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신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포탄이 지나간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실존적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더 깊은 균열은 두 번째 전쟁에서 왔다. 20세기 인류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례 없는 조직적 학살을 통과하며 신앙의 근간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백만 생명의 비명 속에서 신은 침묵하는 듯 보였다. 엘리 위젤은 『밤』(1960)에서 교수대에 매달린 소년을 바라보며 한 수감자가 묻는 장면을 기록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 침묵은 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퍼져나가 20세기 신앙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인간이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는가?” — 이 질문은 교회를 떠난 수많은 이들의 등을 밀었고, 그 빈자리는 냉소와 허무로 채워졌다.
그 질문은 오늘 이 땅에서 더욱 날카롭게 살아 있다.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려워 커튼을 닫고 사는 이민자의 집에서, 신의 침묵은 교리가 아닌 공기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추방의 공포를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온 이민자들, 자녀와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부모들, 코로나 이후 수많은 한인 교회에서 자녀 세대가 조용히 떠나고 1세대의 무릎 꿇는 신앙과 2세대의 돌아선 등 사이에서 교회가 균열되는 현실 — 이 모든 자리에서 신의 침묵은 더욱 깊게 울린다. 그렇다면 이 침묵은 신의 외면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알아채지 못한 가장 깊은 동행인가. 이것이 이 글이 묻고자 하는 핵심이다.
현대 신학의 거장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다시 정의한 인물이다. 17세에 징집되어 전쟁 포로로 영국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며 동료들의 죽음과 조국의 패망을 목격했던 그는, 하나님을 저 높은 곳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전능자가 아닌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만났다. 그의 주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에서 몰트만은 십자가를 신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신 하나님의 처절한 연대로 읽는다. 하나님은 고통을 면제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교수대에 매달리며 그 비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분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신의 부재라는 물음에, 몰트만은 십자가라는 가장 오래된 답으로 응수했다.
이 통찰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1966)에서 문학적 절정으로 형상화된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신자들의 고통 앞에 침묵하는 신을 원망하던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성화(聖畵) 앞에 선다. 그 순간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엔도 슈사쿠, 『침묵』 원문 대의) 신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 아래서 함께 짓밟히는 가장 깊은 동참이었다. 낯선 땅에서 밟히며 살아온 이민의 삶은 이 장면을 추상이 아닌 살로 읽게 한다.
이 희망의 에너지는 역사의 어둠을 뚫고 지나온 이들의 삶 속에서도 공명한다. 소련의 굴라크(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모든 소유와 자유를 박탈당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 영혼의 불멸함을 『수용소 군도』(1973–1975)에 기록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깊은 신앙 안에서 고통을 견디며 진실을 선포했다. 몰트만이 말한 ‘앞서 오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솔제니친은 그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다른 언어로 살아냈다. 희망은 현실을 미화하는 낙관이 아니라, 거짓의 체제에 맞서 영원한 진리를 붙드는 영혼의 저항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수십만 군중에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심리적 기대가 아니었다. 몰트만은 이것을 ‘선취(anticipation)’라고 부른다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정의와 해방을 오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현재의 불의에 맞서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 몰트만이 폐허의 유럽에서, 킹이 짓밟힌 흑인 공동체의 현장에서 각자 도달한 희망의 언어는 놀랍도록 같은 구조를 지닌다 — 약속된 미래가 현재를 변혁하는 힘. 자녀의 빈 예배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의 삶, 추방 통보를 기다리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오늘을 감내하는 이민자의 삶 — 그것도 그 선취의 다른 이름이다.
성서적 희망은 현실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거룩한 반전이다. 죽음이 생명으로 뒤바뀐 부활의 사건처럼, 희망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절망적 현실에 던지는 하나님의 강력한 거부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역동적인 의지이며, 약속된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나그네의 행진이다.
삶의 저변이 무너지고 신의 침묵이 길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몰트만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의 눈물이 고이는 그 낮은 곳에 하나님은 이미 도착해 계신다. 새벽마다 커튼을 닫아야 하는 그 집 안에, 자녀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로 새벽을 지새우는 그 기도 자리에, 하나님은 이미 와 계신다. 그 침묵의 시간은 외면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시는 가장 깊은 포옹이다. 홀로코스트의 어둠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재해석한 몰트만, 박해의 침묵 속에서 밟히는 예수를 그린 엔도, 굴라크의 바닥에서 영혼의 불멸을 기록한 솔제니친 — 이들이 증언하는 희망은 하나같이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커튼 뒤에 계신 그 하나님을 향해, 오늘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