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 J. Thomas) 선교사가 평양에서 순교한 지 160년이 흐른 올해, 그를 둘러싼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라는 일부 비판적 시각을 벗기고 순수한 선교적 열정을 학술적으로 증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30일 오전 총신대학교 신관 콘서트홀에서 열린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 포럼에서 발표자들은 토마스 선교사가 철저히 준비된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복음 전파를 위해 생명을 건 선교사였음을 강조했다. 총신대 부설 교회 선교연구소(소장 유해석)와 예장 합동총회 토마스 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가 주최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이은선 명예교수(안양대)는 토마스를 둘러싼 '순교자'와 '협력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천돼 왔는지 분석했다. 이 교수는 "1890년대 그라함 리, 게일 등 초기 선교사들의 기록과 1909년 마펫 선교사의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식 평가를 통해 토마스는 '성경을 반포하다 죽임을 당한 선교사'로 확립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후 1920년대 평양노회를 중심으로 '토마스 순교 기념식'이 거행되고 동아일보 등 언론에 보도되면서 순교자 담론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며 "하지만 1985년 이후 이만열 박사 등 반제국주의 사관의 평가로 토마스 선교사는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한 인물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고 했다. 

유해석 교수(총신대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장)는 토마스 선교사를 향한 부정적 시각이 1930년대 일제의 왜곡에서 비롯됐음을 지적하며 논의를 이끌었다. 유 교수는 "1936년 조선총독부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선일체론을 펼치며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태평양 전쟁 참여 명분을 쌓기 위해 토마스 선교사를 이용했다"며 역사 왜곡의 뿌리를 짚었다. 

특히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와 관련된 결정적 오류를 사료로 반박했다. 그는 "미 공식 문서에 따르면 당시 토마스가 탄 배는 60~80톤 규모의 소형 상선이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619톤급 군함 '프린세스 로얄호'와는 건조 시기와 크기 모두 다른 배"라고 밝혔다. 

또한 객관적 사료로 평가받는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의 『장계』를 인용해 "토마스는 선주나 선장이 아니었으며, 조선 관원과의 대화에서 당시 조선 쇄국정책의 요청에 순응해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무역을 고집한 선주에 의해 상황이 악화된 것"이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토마스는 영국 회중교회의 칼빈주의 전통(존 오웬 계승)에 기초한 준비된 선교사였다"며 "당시 전염병 등의 위협으로 내륙 선교를 기피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허드슨 테일러처럼 '내지 선교'에 도전한 선구자였다. 그렇기에 당시 상해에서 '해안선 선교'를 추구하던 런던선교단 대표 윌리엄 무어헤드와의 갈등으로 1864년 런던선교단을 탈퇴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와 화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865년 조선 1차 방문 당시 이미 4개월간 체류하며 성경 배포와 조선어 습득에 매진했으며, 2차 방문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확신을 기초로 이뤄진 명확한 복음 전파의 과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영식 교수(한국연구재단)는 토마스의 선교 동기가 입증된 사료와 구체적인 회심 사례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토마스가 1866년 런던선교단에 보낸 마지막 서신에서 '많은 분량의 성서와 책을 갖고 떠난다'고 명시한 점은 그의 조선 방문 목적이 침략이 아닌 복음 전파임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특히 토마스가 배포한 성경을 통해 변화된 구체적인 인물들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 교수가 인용한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따르면, 토마스의 1차 조선 방문 당시 포리에서 500여 권, 석호정에서 100여 권의 성경과 전도문서가 배포됐다. 이 때 김영섭이 성경을 받은 후 아들 종권에게 권하여 온 가족이 신자가 됐다. 

최치량은 12세 때 토마스로부터 성경 3권을 받았으며,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건내줬다. 박영식은 성경을 떼어 자신의 집벽에 성경으로 도배했고, 이후 최치량이 이 집을 구입해 여관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이곳에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 등이 숙박했고, 이곳에서의 예배 모임이 이후 판동교회(장대현교회 전신)로 발전했다. 홍신길 집사, 이신행 권사, 김성집 등이 토마스의 성경 배포와 전도 문서로 훗날 평양 기독교 공동체의 씨앗이 됐다. 

이 교수는 "『고종실록』에는 토마스가 배포한 책을 '이단서'라 기록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복음을 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상품을 팔고자 했던 제너럴 셔먼호와 복음을 전하러 온 단순히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했던 토마스 선교사를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 

하광민 교수(총신대 통일개발대학원)는 북한이 토마스 선교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 탈북민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하 교수는 "북한은 조선총독부의 역사 왜곡처럼 셔먼호 사건을 미국 침략의 시초로 규정하고,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를 격침의 핵심 주체로 설정해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구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토마스 선교사를 '토마스놈'이라 부르며 비하하는 내용은 고급중학교 '력사' 교과서 등 정규 교육과정에 편입되어 강력한 반미·반기독교 의식을 고취하는 데 사용된다. 

실제로 조사에 참여한 탈북민 78명 중 82.1%가 학교 교육을 통해 토마스를 알고 있었으며, 78.2%가 김응우 영웅 서사 교육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강력한 세뇌 교육에도 불구하고, 탈북민의 92.3%가 탈북 이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기독교 수용을 방해하는 주요 장애 요인으로는 ▲수령 우상화 사상과의 충돌(57.7%) ▲북한 체제의 감시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47.4%) 등이 꼽혔다. 

하 교수는 "북한의 반기독교 담론은 단순한 역사 왜곡을 넘어 반미·백두혈통·반기독교를 동시에 생산하는 정교한 프로파간다 체계"라며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교회의 씨앗이었듯, 탈북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과정과 관련된 진실을 안다면 향후 복음 통일의 소중한 씨앗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