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13년 전 S대 병실, 나는 심장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겁이 많은 편인데, 겁이 덜컥 났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나였지만, 평생 쉴 새 없이 일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힘 있게 교수하는 일과 설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영국의 청소년 집회를 앞에 두고 검사차 병원에 갔더니,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비행기표도 구매했고, 호텔 예약도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영국에 간 김에 아일랜드까지 까려고 모든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의사는 '당장 입원하고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큰 집회를 앞에 두고 있어서 병으로 집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나는 목사이고 해외 집회를 취소 할 수 없으니 암 수술 날짜를 좀 미룰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알아서 하슈!"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고, 바로 입원해 전립선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나는 수술 전에 병원에서 하는 모든 예비 검사를 다 받았다. 그런데 병실로 찾아온 의사는 비뇨기과 의사가 아니라, 심장 전문의와 함께 하는 팀들이 들어왔다. 주치의 되는 선생님은 내게 "환자분께서는 전립선암 수술보다, 먼저 심장 수술을 받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심장 수술 일정을 다시 잡았다. 나는 가슴이 쿵! 하면서 내려 앉았고, 머리는 멍~ 해지기 시작했다. 전립선암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했는데, 심장 수술이라니! 억장이 무너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감쌌다. 그때 내 나이 막 70을 넘긴 상태였고, 나는 내 인생이 여기서 끝을 맺는가 싶어 절망과 공포가 뒤범벅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그때였다. 나는 요한 칼빈(John Calvin)의 일생동안 모토였던 "나는 내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I Offer my heart to the Lord)"라는 말이 떠 올랐다. 하나님께서 내게 심장을 주시고 70여 년간 힘 있게 일해 왔는데, '하나님께서 내 심장을 달라고 하시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라고 생각하니 평안이 왔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를 불러 A4용지 4장과 검정 볼펜과 빨강 볼펜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사 한 것이 무엇인지 번호를 매기면서 쓰기 시작했다. 첫째 감사는 전립선암 수술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심장 수술까지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에 감사하는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사의 글을 쓰면 쓸수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깨달았다. 즉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것이 더욱 많아졌고,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니 아주 세밀하게 많은 감사들이 터져 나왔다. 수술 전 시간까지 감사의 내용을 보니 정확히 200가지 감사가 적혀 있었다. A4용지 앞뒤로 꼭 3장이나 되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200가지 감사를 하고 나니, 내 마음에는 평화가 가득 넘쳤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수술대 위에 올랐고, 그렇게 평안함과 감사함 속에 나는 깊은 수면에 들어갔다. 7시간 후에 깨어나니 사모와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또 감사가 터졌다. 

수술할 때 앞가슴 절개를 20cm 하고, 갈비뼈 절개했던 것을 봉합했다. 약 1개월 정도를 옆으로 누울 수도 없어, 반 절반 자세의 상태로 견디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가 좌로, 우로, 또는 옆으로 누워 잘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감사였구나!'라는 것이었다. 심장 수술 후에 전립선암은 방사선으로 치료했고, 십수 년간 지금까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볼펜으로 200가지 감사를 썼던 것을, 지금도 성경책에 그대로 끼워 놓고 있다. 그리고 어느 교회 설교 중에 혹시 감사와 관련된 설교를 하거나, 내 경험을 말하게 될 때, 나는 200가지 감사한 것을, 보여 주면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감사가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것을 간증하곤 한다. 

사실 신학자들은 늘 논리가 앞서 있다 보니, 영적 생명과 은혜에 대해 둔감하기 쉽다. 나는 평생 신학자로서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살아왔지만, 그래도 영적인 뜨거움을 잃지는 않았다. 비록 연약한 인간이지만, 목사로, 교수로 평생을 살면서, 처음 소명(召命)을 받을 때, 하나님께 매달리고, 딩굴던 첫 열심과 신앙을 평생 갖고 있는 것도 은혜 위에 은혜요 복의 복이다. 최근 모교의 한 포럼을 인도하면서 <개혁 신학에 생명 불어넣기>라는 주제로 발제했었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좋은 것은 맞지만, 그것은 <말씀>과 <성령>이 더불어 역사하고, 목사나 성도의 가슴에 은혜와 진리로 작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감사도 결국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설 때,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된다고 본다. 

카이퍼(A. Kuyper) 박사는 "우리는 '삭막한 정통주의'만 붙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감사와 감격의 삶이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추수 감사절 기간에 지난날, 나의 '200가지 감사'를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