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H.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우리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How should we think about the death penalty?)를 22일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샬럿의 통근 열차에서 발생한 한 젊은 우크라이나 여성의 피살 사건은 단순한 비극적 헤드라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악이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도시를 배회하는 무서운 현실임을 상기시킨다. 악이 육체와 피를 입고 나타날 때, 그것이 통근 열차 안에서든, 혹은 찰리 커크의 충격적인 암살 사건이든, 사회는 단순한 권리를 넘어 정의의 전적인 힘으로 그것을 억제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여전히 사형제가 법전에 남아 있지만, 지난 20여 년간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끝없는 법적 다툼, 무수한 항소, 그리고 정치적 미온적 태도는 제도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무고한 자들의 피는 여전히 땅에서 부르짖고 있다(창세기 4:10).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선언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세기 9:6).
이 명령은 전 지구적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세상을 폭력으로 심판하신 직후, 인간 정부에 주신 첫 번째 명령이었다. 이는 모세 율법 이전에 이미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구속력 있는 규범이었다. 따라서 사형은 야만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존엄에 근거한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이다.
사형제가 범죄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통계 논쟁을 떠나, 살인자의 사형은 최소한 그가 다시는 살인을 저지를 수 없다는 절대적 안전장치가 된다. 사형을 거부하는 사회는 미래의 잠재적 희생자와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도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사형에는 단순한 범죄 억제 이상의 도덕적 차원이 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명확하게 선언한다. 불법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자는 가장 높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사형을 포기하는 것은 의도치 않게라도 "생명은 값싼 것"이라는 속삭임을 내뱉는 것과 같다.
윌리엄 H. 베이커 박사는 그의 저서 Worthy of Death에서 이렇게 말했다. "응보란 본질적으로 무너진 균형을 회복하는 정당하고 도덕적인 개념이다."
2015년 9월, 노스캐롤라이나 보수주의자들의 일부는 "사형제 반대 보수주의자 모임"을 결성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폐지를 촉구했다. 그들 가운데 한 변호사는 기도로 숙고한 끝에 더는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그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신앙의 문제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더 이상 사형제를 지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강력한 법과 질서의 옹호자다."
하나님께서 가장 악한 죄인조차 구원하실 수 있음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가 정의로운 형벌의 필요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자비와 정의가 입맞췄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질서가 충족되었고, 동시에 죄인에게 은혜가 주어졌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죄에 대한 궁극적 형벌을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실행하셨다면, 왜 국가가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자에게 정당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하는가?
사형은 구속을 막지 않는다. 십자가 위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누가복음 23:39-43).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실제로 많은 사형수들이 죽음을 앞두고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사형은 오히려 영원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교회의 사명은 은혜와 화해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칼을 쥐고 정의를 집행해야 한다(로마서 13:4). 살인자를 살려두는 것은 겉으로는 자비처럼 보이지만,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사회에는 잔혹함이다. 잠언 17:15은 경고한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정죄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찰리 커크의 죽음을 보라. 이데올로기적 증오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진 순간,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자체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 살인범이 사형을 확실히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토록 대담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문화는 살인을 부추기고 사회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샬럿 열차에서 희생된 여성과 신념 때문에 암살당한 공적 인물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그 둘은 동일한 경고다.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사회는 폭력을 정상화하며, 악에 무감각해진다. 국가는 이 신성한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국민을 사냥감으로 내몬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마비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은 이 보편적 진리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 사형제는 잔혹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 타락한 세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다.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많은 폭력, 더 많은 희생자, 더 많은 가정의 파괴, 그리고 보복을 요구하는 더 많은 피가 있을 뿐이다.
살인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결국 무고한 자에 대한 잔혹함이 된다. 미루어진 정의는 정의의 상실이다. 국가가 의로운 칼을 휘두르기를 거부할 때, 사회는 결국 무법의 칼날에 피 흘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