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누구나 잘 아는 말씀으로 왠지 들을 필요가 없는 말씀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가 아는데 비해 잘 지켜지지 않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잘 아는데도 서로 비판하여 싸우고 갈라지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 않습니까?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에 대한 비판의 얘기를 한 뒤에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해주세요!’라고 덧붙이는데 그것은 비판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는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계에서 존경받았던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은 교회가 부흥할 때 야당역할을 하겠다는 사명으로 목사님의 부족과 약함을 자주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들으면서 힘들어하던 목사님이 어쩌다 사모님의 약함이나 잘못을 비판하면, 그것은 그렇게 싫어하고 화를 내셨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일화도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에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검열관 같은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검열관이란 상대방에게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실수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흠잡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검열관같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행위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비판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무서운 교만의 죄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과실은 다 먹되 유일하게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그 열매를 먹기 전에는 서로 허물을 보지 않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에는 남자는 여자 탓, 여자는 뱀 탓을 하고 결국 지으신 하나님까지 비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기에 비판하는 것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후 더 철저히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이 예수님께 가장 책망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 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 세리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비판하므로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오히려 그 비판이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체를 다 볼 수 없는 인간이기에 결국 비판이란 언제나 부분적입니다. 또 인간의 눈은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에 앞에서 본 것과 뒤에서 본 것이 다르고, 지금 본 것과 몇 시간 후에 본 것이 다릅니다. 이런 연약함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비판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실천을 통해 가정과 직장에서, 교회와 공동체에서, 화목과 승리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