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한민족 정신 뿌리내린
무속 처음으로 부정한 집단
선교사들, 의술로 무속 이겨
미신으로만 치부한 건 아쉬워
무속 대응 가능 성경적 지혜
회복해야 할 시대적인 소명
무속에 대한 의존성: 양반들과 왕실조차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무속
고려조 때도 조선조 때도, 무속은 한반도의 지배층으로부터 천대받는 종교 풍습이었다. 그렇다 해서 무속이 무조건 금기시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지배층의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무속인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는 않았다. 한반도 민중과 무속 사이 오래된 끈끈한 관계를 국가 권력이 강제로 끊어놓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일부 지배층 인사들, 즉 왕실 구성원이나 고위 양반가문에서도 무속에 심취한 이들이 항상 존재했다. 조선조 숙종의 왕비였던 장옥정(장희빈)의 사례가 가장 유명하다. 원래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선 장옥정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궁궐 안에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의식을 벌였다.
이 일이 밝혀지며 장옥정은 숙종으로부터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을 받아 죽는다. 이 사건을 '무고(巫蠱)의 옥'이라 하는데, 여기서 무고란 무속의 저주의식을 말한다.
사실 조선 왕실에 이와 비슷한 사건은 여러 차례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은 광해군 때, 영조 때, 그리고 정조 때에도 궁궐 내에서 저주의식을 행한 이들이 줄줄이 사형당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저주가 아닌 병의 치유를 위한 굿이나 의식은 워낙 흔하게 시행되어 별로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왕실에서도 왕이나 세자, 왕자들이 병들었을 때(특히 두창에 걸렸을 때) 왕실 여인들이 무속인을 불러 굿을 시행하곤 했다. 양반 가문도 비슷한 형국이었다.
즉 전근대 한반도에서 무속은 평상시에는 천시되는 풍습이었으나,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이나 재앙의 앞에서는 어떻게든 의지가 되는 종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민족의 정신에 뿌리깊게 내린 무속을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전면 부정한 집단은 바로 기독교회였다.
주로 미국에서 건너온 한국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교인들이 무속인에게 의지하는 것을 주로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 엄금했다. 그들은 '신접한 자'에게 앞날을 묻고 병 나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 영적으로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가르쳤다.
고려조와 조선조 당시 무속이 '점차 교화해 나가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종교적 풍습'이었다면, 구한말 개화기 기독교인들에게 무속은 '순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할 우상숭배'였던 것이다.
게다가 서양 선교사들은 이전에 불교나 유교를 숭배하던 한반도 지배층이 갖지 못했던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바로 서양 의학이었다.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서양 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뛰어난 외과의사였다. 그는 갑신정변 당시 왕비 민자영이 아들처럼 아끼던 조카 민영익의 목숨을 구해준 일로 조선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맬 때 어의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 외무협판(외교고문)으로 일하고 있던 독일인 외교관 목인덕(묄렌도르프)은 서양 의사 알렌을 강력히 추천했다. 이에 알렌은 시급하게 달려와 민영익을 수술해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김건배 화백의 유화 작품으로, 알렌의 민영익 수술 장면을 묘사했다. 알렌 옆의 서양인 조선 고관이 독일인 외교관 목인덕이다. ⓒ세브란스병원
무속에 대한 무지: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무지
이 일로 조선 왕실은 서양 의학의 힘에 놀랐고,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우정총국 총판 홍영식의 저택을 알렌에게 하사하여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변경)을 설립했다. 물론 여기에는 서양 의학의 힘을 빌리려는 의도뿐 아니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서구 열강인 미국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도 컸다.
어쨌든 이 제중원은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도성 백성들에게 서양 의학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1886년 한양도성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약 6천 명이 일시에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러나 제중원 의료선교사들의 말을 들었던 이들은 대부분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다.
이에 1895년 다시 도성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라는 방을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천연두나 콜레라가 창궐하면 무조건 무당을 찾아야 한다던 도성 백성들의 인식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지방에까지 퍼지면서 무속인들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초기 제중원.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맡았으며 도성 백성들에게 서양 의학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훗날 세브란스 병원으로 새로 개축된다.
한국 기독교회는 주로 북미에서 넘어온 선교사들의 공로에 힘입어 설립됐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세계관과 인간 이해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이들 선교사들의 세계관 속에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서구 근대 세계관 또한 뒤섞여 있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칸트 선험론이나 과학적 실증주의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아 초자연적인 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이들은 복음의 핵심인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병 나음을 위한 기도의 힘은 인정했지만, 안수를 통해 병이 낫는 이적에 대해서는 가르치기를 꺼렸다.
이는 아마 한반도에 처음 건너온 선교사들 중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의사(알렌, 존 헤론, 올리버 에비슨, 릴리어스 호튼)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의 헌신은 한반도에 복음을 전파하고 무속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소 아쉬운 측면도 있었다. 바로 무속을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에 대립되는 미개한 미신으로만 치부한 일이었다.
성경에는 한국의 무속인에 해당되는 샤먼들, 즉 신접한 자들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경은 이 샤먼들을 대하는 영적 지혜와 권능을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대중문화와 온라인-모바일 기술을 통해 다시금 한국 사회 내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해가는 무속. ⓒ티빙
하지만 19세기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속을 대할 때,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근대적·과학적 인식론에 입각해 무속을 무조건 지탄하고 멀리하도록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샤머니즘에 대응하기 위한 성경적 이해는 상당 부분 묻히고 말았다. 신접한 자, 점하는 자, 귀신에게 제사하는 자들의 이면에 어떤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고, 그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전쟁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도하며 어떤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과 지혜, 그리고 교회에 축적된 '노하우'가 한국교회에 적절하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대중문화와 온라인-모바일 기술을 통해 다시금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해가는 무속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교회가 한국 전통의 샤머니즘인 무속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이, 무속은 한국인들과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맺어진 정서적 친밀감을 되살리며 보다 세련되고 현대화된 모습으로 대중에게 접근하고 있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