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이런 날이 있습니다. 한규삼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서울의 충현교회는 제가 중생하고 신앙적으로 자라난 곳입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한 곳이고 많은 친구와 선후배가 있는 교회입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열심을 내지 못했고 복음의 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시절 친구의 전도를 받고 나간 충현교회는 제 신앙의 고향입니다.
그 고교 시절 교사로서 가르쳐주셨던 교역자와 어머니 같은 여전도사님이 아직도 계십니다. 대학부 청년부 시절의 선배, 교사님들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십니다. 철없고, 고집 세던 개구쟁이가 지금은 목회자, 원로목사가 되어 여러 신앙의 선배들 앞에서 설교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친구들도 메시지를 듣고 찾아와서, 윤복이, 광국이, 영미 그리고 경호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고등부 친구, 대학부 친구와 청년부 선후배를 만나면서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함께 긴장하고 기뻐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저의 멘토이신 서울대 명예교수이신 김홍우 집사님이 계십니다. 부부가 함께 저녁예배까지 드리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는데, 그 중간에 잠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요일 다시 뵙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위대한 지연”(the great delay)이라는 다윗에 대한 저의 설교 중의 평가가 너무 감동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떠나시면서 최근의 저술, 『영국정치와 보통법: 데이비드 흄의 「영국사」 읽기』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최근에 번역 출판한 리처드 보쿰의 『성경과 정치』를 드렸습니다.
교회에는 신앙의 도전을 주신 많은 선배가 계십니다. 그리고 김홍우 선생님의 존재 자체는 제게 학문적인 도전입니다. 제가 전적으로 학문의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학문에 대한 매력을 버리지 못한 것도 선생님의 도전 때문일 것입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할 때, 수십 권의 고전과 철학책을 읽어야 하는 선생님의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나마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겁 없이 붙들게 된 이면에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독서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학술원’의 요청으로 자신이 지난 2년 동안 지은 한 권의 책 때문에, 80세에 이른 노학자가 지속적 연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느꼈다” 말씀하셨습니다. 수요일 점심에 다시 만나 1997년 이후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읽던 기억을 나누었더니 선생님은 잊어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아모스에 대한 피상적인 대화로 선생님께 꾸중을 듣던 이야기, 멀리 강진의 다산초당과 완도의 해변에 방문한 이야기와 목회하러 떠나는 것을 축하해 주던 “독립신문 읽기 모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앙이나 학문이나 ‘누구를 먼저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매우 비판적인 것 같지만, 비판적 관점을 가지기 전 무비판적 수용이 우리의 마음의 백지에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영향은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을 인문학에 수용하려는 20세기의 유럽의 학문적 조류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려 했던 현상학자와 사상가를 소개해주신 데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그리고 정치사상가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친구와 선후배를 보면, 그분들은 직, 간접으로 저의 신앙과 생각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가교를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을 다행이라 여김은 그분들이 저의 신앙과 삶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하늘이 주신 징검다리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선한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