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기로 한다.

제 4 장 풍남문(豊南門)의 성곽길을 따라(1896-1904)

농민항쟁에 스러진 함성을 껴안고

남도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하위렴에게 곧바로 전주 사역이 맡겨졌다. 6개월의 언어훈련과 짧은 탐사 여행만으로는 문화와 풍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었지만, 하위렴은 먼저 온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현장에 부임해야만 했다.

말로만 들었던 전주는 제주도를 포함해 전라도 전체를 호령하던 전라감영의 소재지로 호남의 수부首府였던 터라, 하위렴이 전주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4 대문이 성곽을 돌아가며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여유로움을 뽐내는 남쪽의 문만큼은 남문이라 하지 않고 꼭 풍남문으로 불렸는데 풍남문은 아예 전주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전주는 왕조의 본향으로 격식과 풍취가 곳곳에 배어있었고, 반가班家의 기풍이 확연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전주 풍남문
(Photo : ) 전주 풍남문

여기서 잠시 하위렴이 전주에 부임하기 2년 전(1884)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188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들은 5월 11일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5월 31일에는 마침내 전주성에 무혈입성을 감행했다. 농민군에게 전주성을 내주었다는 소식에 놀란 조정에서는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전주화약全州和約까지 맺어 수습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마음을 바꾼 고종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면서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내세워 곧바로 조선에 군대를 상륙시켜 청일전쟁의 빌미를 만들고 말았다. 이후 벌어진 양국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개혁을 앞세우며 노골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자, 이미 곳곳에 흩어졌던 동학 농민군들이 척왜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궐기하기 시작했다.

한양을 향해 북상하던 농민군은 공주 근교 우금치에서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과 충돌했으나 처음부터 농민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승리를 거둔 관군과 일본군은 곧바로 기세를 몰아 전주성 공략에 돌입했다. 전주성에서 일진일퇴 공방전은 주변의 민가 8백여 호가 불에 탈 정도로 치열했으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농민군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위렴이 전주에 부임한 시기(1896.11.23)는 농민항쟁이 수습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는 성 안팎 주변에는 참혹한 현장을 방불케 하는 수습의 잔재가 그때까지도 곳곳에 남아있어 처연悽然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요동을 치던 정치적 격변기에 내한했던 선교사들은 동학 농민항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를 생각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전문적인 연구가 좀 더 필요한 대목이지만 일차적으로 그들은 선교사였다.

그들의 내한 역사는 사실 매우 일천日淺해, 모순으로 가득한 구한말의 현실을 변혁하려 했던 민중의 생각을 공유한다거나 그들의 처지를 읽어낼 만한 태세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일부 선교사들만이 동학은 최제우에 의해 시작된 조선 고유의 종교이며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면서 농민항쟁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 뿐, 선교사들의 대다수는 소통을 통해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異敎徒 정도로만 동학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과 개신교의 실제적인 만남은 캐나다 출신 맥켄지(W. J. McKenzie) 선교사가 체험했던 일화가 한 예가 될 것이다. 맥켄지 선교사가 1894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황해도 장연의 소래 마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황해도 일원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로 해주성이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지켰는데, 놀랍게도 그 마을을 점령한 동학군들은 교회와 선교사를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후 상황이 반전되어 일본군의 진압으로 동학군이 수세에 몰리자, 이번에는 반대로 소래교회가 동학군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는 거였다.

이 사실을 두고 감리교 선교사 존스(H. J. Jones)는 동학의 '한울님'과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점은 기독교는 초월적 인격신인 데 반하여 동학의 한울님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다고 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고 언급하면서 그런데도 동학과 기독교는 일신론적 신관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동학은 개신교와의 다양한 교섭 속에 동학의 한울님이 기독교의 하나님(God) 개념으로 전이되면서, 경계가 붕괴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에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며 새롭게 변신을 시도했지만, 동학이 추구하는 개벽과 기독교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공통점이 발견되면서 동학 농민군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황해도 신천의 동학 접주 방기창은 선교사 마펫을 만나 복음을 듣고 1907년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소접주로 해주성을 공략했던 백범 김구의 개종이라든지 남장로교 선교지역에서도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목사가 된 최중진, 최대진 형제와 하위렴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동련교회 백낙규 장로 역시 동학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다.

전주지부에 합류하다

서문 밖 완산 언덕 은송리에 이삿짐을 푼 하위렴은 초가집을 진료소로 개조해 사역의 준비를 마쳤다. 1897년 3월 6일(토요일)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진료소 출범 예배를 드리고 그 이튿날 주일에는 그동안 전도를 했던 8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선교부 내 설치한 진료소가 알려지면서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고, 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의료선교의 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혼자서 그해 10월까지 370여 명의 환자를 550차례에 걸쳐 진료했다. 하위렴은 의료 사역은 그해 11월 잉골드Mattie B. ngold가 전주에 파송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볼티모어 여자의대를 나온 잉골드가 의료 사역을 전담하면서부터 하위렴은 복음 사역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 이듬해 6월 전주로 내려온 레이놀즈와 함께 테이트와 하위렴이 전주 일대를 순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주에서의 사역은 점차 활기를 띠어갔다.

하위렴은 당시 전주지부의 활동을 1897년 7월 18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이날이야말로 자생적인 전주교회에 있어 생기가 넘치고 기념할 만한 날이다.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다섯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테이트의 사환 유 씨, 김 씨, 함 씨 부인 그리고 김 부인의 아들 옥와 가 세례를 받았다. 전 씨도 세례를 받기로 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놀즈가 그 예배에서 설교했으며 세례식을 집례했다."

하위렴은 부녀자들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신의 숙소인 사랑舍廊을 예배처소로 개조해 천으로 만든 장막을 쳐서 남녀가 따로 앉되 서로 볼 수 없게 하고, 중앙에 선 설교자만 남녀 모두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만 20명가량 출석했으며 매 주일 규칙적으로 헌금을 했고, 회계가 선출되면서 교회조직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1898년에는 두 사람이, 그 이듬해는 겨우 한 사람만 세례를 받을 정도로 교회의 성장은 미미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며 진전이 되고 있었다.

각주
1. 풍남(豊南)이란 풍패(豐沛)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전주를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부른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풍패는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다 비유한 것이다.
2. 조선시대 전주성의 남문으로써 2층 누각에 걸린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란 현판은 전주가 호남의 수부(首府)임을 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1907년 일제는 군산과의 도로를 낸다는 이유를 들어 남문을 제외한 3개의 성문과 성벽을 허물어 전주의 기품을 훼손해 버리고 말았다.
3. William M. Junkin, "Tong Hak", The Korea Repository, Vol. 2, Feb. 1885, pp. 56-61
4. 이영호, "동학과 개신교, 그 갈등과 소통의 이야기", 기독교사상, Vol. 663, Feb. 2014
5. 옥와는 김창국의 아명이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첫 열매로 호남에서 평양신학교에 진학한 첫 번째 교인이었다.
6. William B. Harrison, Journal, Nov. 24, 1895 ~ Dec. 25, 1897, pp. 44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