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거리가 왠지 달라 보였다. '어...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닌데...' 먼저는 사람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든 모습이었고, 차량도 줄어든 느낌이었다. '확실하게 코로나의 여파가 세긴 셌구나.' 그리고 또 거리를 자세히 보니 교통 위반 장면이 잘 보이질 않았다.
차들이 신호등 앞에서 제법 질서 있는 모습이다. 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변화라 느끼고 운전을 도와주시는 한족 분에게 물었다. 통역하는 조선족 가이드 형제에게 돌아온 답변은 아까 비행기와 입국수속 시 느꼈던 상황의 연장이었다.
도로 한복판의 중앙분리대와 거의 10미터 간격으로 있는 감시카메라 덕분이라고 했다. '이유가 있었구나...' 자발적인 질서가 아닌, 벌금과 벌칙 점수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강제력 덕분이라.
구약에서의 율법과 같은 그런 채찍, 벌, 무서움이 작용한 것이라 보니 인생이나 문명은 처음부터 자발적인 질서와 평화가 된 것이 아니라 구속, 강제, 물리적인 압제, 교육 그리고 인간 본연의 자유라는 신성불가침이 학습되거나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자리 잡혀 가는 것임을 목격하였다.
교수님, 우리 탄 이 차 안에도 앞에 뒤에 카메라가 장착되었어요. 라며 조선족 가이드 형제분이 귀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럼, 우리가 여기서 대화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다 생중계된다는 말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형제는 "중국에서는 아직 되는 일도 다 없고, 또 안 되는 일도 없지요 ㅎㅎ" 우리 차는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도록 운전기사님께 특별히 도움을 적당하게 드렸으니 염려하지 마세요"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 더해짐을 안고, 도착한 곳은 용정의 명동촌 바로 애국지사인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그 교회당이었다. 처음 중국을 방문한 1기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핸드폰 카메라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필자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는데, 처음 보았던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교회당과 생가의 형태가 아주 반듯하게 변해있었다.
물론 그 중간에도 여러 번 가서 변화된 모습을 보았지만 광장의 바닥도 새로 단장된 공용화장실과 여러 소개글들이 적힌 간판과 비석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그 출입구의 비석에 아니 왠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니... 마음의 의문과 기분이 나빴다.
일본의 탄압에 맞서서 저항한 애국지사인 그가 이곳 만주로 온 사연은 사실 믿음과 신앙심이 깊었던 평양에서 일본이 강행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함이었다는 내용은 없고, 그냥 일본을 대항해서 글과 시를 썼고 청년의 나이에 애석하게 일본에 의해서 죽었다(28세에 생체실험으로 사망).
이런 식으로 반일감정만 부각시키고, 중국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논조를 인민들에게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우리 민족의 시인을 마치 자신들의 국민처럼 자랑질을 하고 왜곡할 수 있을까!
이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국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세뇌하려는 그들의 속셈을 이곳 명동촌(윤동주 생가)에 들어서면서 세워놓은 기념비에서부터 대놓고 노골화하고 있었다.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젊은 생명을 바친 대한민국의 사람을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라니, 그렇게 자유와 독립을 움쳐가도 되나? 그렇게 훔친 그 자유의 희생과 정신, 가치를 정작 본인들은 억압하고 통제하고 있지 않는가!
<다음 호에 계속>
기드온동족선교 대표 박상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