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북한-중국 국경의 선교지를 방문했다. 매년 2차례 이상 경험했던 생생한 현장을 못 보아서 많이 답답했었다. 물론, 중국당국의 선교활동의 탄압으로 중국 내 처소교회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많은 한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현지 사역자들이 억류되기까지도 했기에 마음은 더욱 타들어 갔었다.
코로나가 소멸되고 중국 내 여행이 시작되면서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마침 한국지부의 전략학교 1기 수료생들의 수료식 직후 6월 초로 일정을 잡았다.
훌륭한 강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배운 강의와 백두산 등 민족의 숭고한 독립투쟁의 장소였던 연변지역과 북녘땅을 바로 볼 수 있는 두만강까지 처음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들뜬 25명의 수료생들과는 달리 필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최근 중국당국이 여행자들 특히 미국시민권자들에 대한 감시와 조사가 매우 엄격하여 입국심사 시 가방은 물론 핸드폰과 노트북까지 뒤진다는 뉴스에 이번에는 아예 노트북은 물론, 핸드폰까지도 가지고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많은 억류되었던 분들이 노트북과 핸드폰 등이 결국 큰 문제가 되었다는 간증들을 들어서였다.
그런데, 출발부터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오산리 기도원에서의 집회 시간이 우리가 출발하는 날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25명은 원래 대로 출발을 하고 대신 필자와 한국지부장은 오산리기도원(원장 김원철 목사)의 집회를 마치고 다음 날 가는 것으로 하루를 연기했다.
아무 경험이 없는 수료생들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 약간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병원에서 포기한 신장염을 낫고자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여러 번 다녔던 오산리 기도원에 50년 만에 다시 방문한다는 감격과 섬기고 있는 동족선교사역을 여러 동료목회자들 앞에서 나눈다는 설렘이 더 내 마음의 자리를 자리 잡았다.
집회를 마치고 밤늦게 공항 근처 숙소로 오니, 먼저 간 일행들 모두가 무사히 잘 도착해서 첫날 일정을 잘 마쳤다는 메시지가 톡으로 왔다. 안도함을 안고 4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다음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갔다. 핸드폰과 랩탑이 없이 공항검색대를 통과하여 비행기에 탑승을 하니 약간은 허전하면서도 홀가분한 양가감정이 들었다. '손에 늘 쥐고 있던 것을 놓으니 어색한 건가, 허전한 건가...
개운하기도 하네ㅎ 늘 그랬듯이 비행기에 앉으면 30분 안에 잠이 들었다. 도착 30분 전에 약간의 소음으로 단잠을 깼는데, 창문 커튼을 모두 반드시 닫아달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아니 보통은 이착륙 시는 창문 커튼을 여는데... 무슨 일이...?'
안내원들의 방송 목소리는 사뭇 엄중하면서도 단호했다. "중국당국의 지시로 이 지역은 군사지역입니다. 만약 착륙 시 창문 커튼이 열려있음이 발각되면 우리 비행기에 탑승한 모두는 몇 시간이나 조사가 다 완료될 때까지 그대로 여기 있어야 하면, (표현이 죄송스럽지만) 그 승객은 공안 요원들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 ㅜㅜ 그전에도 여기는 군사지역이었는데, 그때는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사람들을 겁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나...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없는 거부감과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고 마음까지 느끼며 다행히 불상사가 없이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늘 가던 통로인데 왠지 카메라가 유독 많은 느낌과 왁자지껄한 소음은 줄어든 이상한 분위기였다. 외국인 라인에 한국지부장과 나란히 섰다. 한국지부장 줄이 먼저 차례가 되었고 얼마 후 옆의 내 줄 차례가 되어서 독수리 마크의 여권을 심사관에게 내밀었다.
그의 눈초리가 유독 매서워 보였다. 그리고 바로 묻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 취조실의 동료에게 신호를 했다. 바로 조선족 직원이 내게 오더니 "저기 방으로 가시죠"하는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기드온동족선교 대표 박상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