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팔복 4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서, “주리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논 테스’인데, 그냥 배가 고파서 음식을 찾을 때 느끼는 시장기 정도가 아니라 ‘심히 배가 고파 굶주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프리카나 전쟁터 같은 곳의 아사 직전의 굶주린 사람들과 같이 ‘지금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상태’ 입니다. “목마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딥손 테스’인데, 잠시 목이 말라 물을 찾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사막에서 ‘죽기 직전까지 가서 물을 찾는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의”를 향해 이런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의리, 옳음, 바르고 정직함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잣대에서의 의를 뜻합니다. 앞선 복들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말씀하듯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기준과 잣대로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사이에 불량식품으로 배불러 버리면 엄마가 정성을 다해 준비해준 영양가 있는 좋은 음식을 못 먹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미칠 수 없는 ‘자기 의’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잘못이 있는 다른 사람을 희생 제물로 삼아 선악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기가 의롭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늘 남과 비교하며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니까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또 ‘자기 의’의 사람은 열심히 할수록 비난, 정죄, 심판의 말들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복된 배부름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성장기록을 가진 한국 교회가 다음세대들을 교회에서 잃어버리게 된 것도 바로 ‘자기 의’에 빠진 잘못된 부모세대의 신앙에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포커스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하는 다윗처럼, 언제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하나님이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더니 많은 문제와 대적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부족함이 없는 복을 누렸습니다. 또 그 복은 넘쳐흘러서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고 유다 전체를 살렸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복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와 고난과 대적과 약함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참된 의의 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