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고립되었고 세계의 흐름에 눈과 귀를 닫았다. 그 결과로 조선 말기는 통상무역을 하려는 대국들의 압력과 군사적 침략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결국 조선은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개방의 물꼬를 열었다. 다음해 고종은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대표단의 공식 이름은 '보빙사절단', 또 다른 이름 '견미단'으로 불렀다.
견미단은 1883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로 시카고를 경유하여 워싱턴DC, 뉴욕, 보스턴까지의 대장정으로 소방서, 학교, 기업, 행정기관, 미 대통령과 정치인 조우하는 등 미국을 탐방하였다. 이들의 방미는 조선 말기의 개화 과정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볼티모어 기차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평소에도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존 가우처 목사는 견미단을 발견하고 통역을 대동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응답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조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만남으로 가우처 목사는 '은둔의 왕국' 조선에 입국하는 것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자유 문명 유입의 물꼬를 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가우처 목사는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보를 보냈다. 결국 맥클레이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가우처 목사의 후원으로 조선으로 무사히 입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종을 만나 미국 의료인과 교육인의 조선 입국을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다.
위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드디어 1884년에 호러스 알렌과 1885년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매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이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견미단의 방미를 통해 동양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하셨다. 견미단은 단순히 사절단을 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문물과 자유사상이 조선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83년 견미단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정동에 정착하여 정동제일교회, 근대식 배재학당과 독립신문사 등을 출범시켰다. 그 열매로 기독교 복음과 개화사상을 국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에서 자유의 개념을 배우며 새로운 나라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2024 견미단의 방미를 위하여 7월 6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역사탐방은 1776년 미국의 건국 정신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으로 이어지는 독립정신과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뿌리와 기둥을 세워가는 견학이 될 것이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한국의 자유와 독립사상이 태동하는 현장을 밟으며 역사의식을 고취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나라 초대 및 건국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10대 청소년과 20, 30대 청년 50명이 단장 조평세 박사(1776연구소 대표), 부단장 손영광 교수(바른청년연합 대표)와 함께 7월 14일부터 27일까지 역사탐방을 떠난다.
주요 탐방지로 하와이에서는 한인기독교회, 오아후 공동묘지, 호놀룰루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진주만 기념공원, 애리조나호와 미주리호, 칼리히 초등학교(한인기독학원 터), 마우나리 요양원 등을 방문한다.
그리고 보스턴에서는 하버드대학교, 메이플라워호, 플리머스, 필그림파더스 기념탑을 둘러보고, 뉴욕에서는 컬럼비아대학교, 맨해튼 영웅들의 골짜기를, 아울러 프린스턴에서는 프린스턴대학교 등을 견학한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이태산 묘지, 크라이스트처치, 리버티벨, 인디펜던스홀(독립기념관), 리틀시어터를, 애나폴리스에서는 메릴랜드 주의회, 워싱턴D.C. 링컨 메모리얼, 한국전쟁기념공원, 아메리칸대학교 이승만 벚꽃나무 등을 찾아 볼 예정이다.
우리의 젊은 청년들이 미국의 독립 역사와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 외교 및 역사의 흔적을 탐방하면서 자유대한민국 미래의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