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북서쪽, 사우전 오크스에 위치한 웨스트레이크 한인교회(담임 이요셉 목사)는 6월 14일(금)부터 16일(주일)까지 노진준 목사(순회설교자, 설교 코칭 사역, PCM 공동대표)를 초청해 한여름 밤을 은혜로 물들였다.
15일(토) 오후 늦은 시간인 7시 30분, 말씀을 듣기 위해 웨스트레이크 한인교회를 찾은 이들에게선 피곤한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요셉 목사의 기도와 찬양으로 시작된 집회는, 요 18: 15-18, 25-27절 성경봉독에 이어, 노진준 목사가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다. 어릴 때부터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어릴 때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강요에 의해 사용했고 어른이 된 후에는 제 의지가 약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좋아해 매번 어머니에게 야단 맞고 당시에는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하면서도, “ 제 마음 속 소원은 제가 어른이 되면 딱지치기를 그만두려는 마음이 아니었다”며, “매 맞으면 안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가 중학생이 되자 딱지치기가 더이상 재미가 없어졌고 딱지치기를 그만뒀다.
죄에게 여전히 쾌락을 느낀다면, 끊을 수 있을까?
그는 “죄도 그럴 것이다. 여전히 죄가 즐거운 상황에서 쾌락을 느끼는 상황에서 멈춘다는 게 쉽지 않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충동에 의해서 후회할 일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회할 일을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야식 습관을 예로 들었다.
“목회할 때 일주일에 5번은 야참을 했다. 저는 과자를 좋아하고 밤에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면 몸도 붓는 것 같아서, 제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은 ‘밤에 절대로 안 먹을 거야’였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저는 정말 야참을 먹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말한다. ‘내가 오늘도 밥 차려 달라고 그러면 돼지야’라고 그래. 진심이었다. 돼지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야식의 습관을 끊을 수 없었다.”
그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신 장면으로부터 그가 세 차례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으로 이끌며, 그 안에 담긴 함의를 살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나? 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은 안 만나는 것이다. 그 시간이 밤 12시 쯤 되었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 있으면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베드로가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려 하는데 많은 무리의 군인들이 그 숙소로 들이 닥쳤다. 베드로는 주님이 걱정되어 요한을 데리고 데제사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을 지키던 하인이 묻는다. ‘너도 그와 함께 있던 자가 아니냐.’ 그날 그가 본 예수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대제사장의 종이 뺨을 때리고 욕하고 침을 뱉었다. 주님의 옷은 찢겨지고..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권력의 힘이 느껴져 두려움이 엄습했다.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너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니냐’ 묻자, 예수님처럼 비참한 모습이 될 거 같아, 아니라고 부인했다. 부인할 수 없는 상황, 틀림없는데 억지스럽게 아니라고 부인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베드로가 자기 의를 과시하고 싶었다면,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극도로 조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대제사장의 집에 가지 말았어야 한다.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갔어야 한다. 잠시 몸을 숨겼으면 됐다. 그는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 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주님이 걱정되어 따라갔다. 순간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지만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애정이 있었다.”
그는 이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들을 나눈 뒤, “이 사건은 어떻게 배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아니다”라며, 부활 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으로 접근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저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말에서 위선이 느껴진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정상적 반응은, ‘주님 잘못했습니다’이다.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나. 예를 들어, 한 남편이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다 걸렸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나 사랑해?’ 그때 뭐라고 말해야 되나? ‘미안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내가 실수했다. 한 번만 용서해 줘’라고 해야 한다.”
그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그 고백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부름받아 나선 이몸(아골 골짝 빈들에도)’, ‘온 맘 다해 주를 사랑합니다’ 같은 찬양을 부르는 것은 위선처럼 느껴져 부르지 못했고 했다.
노진준 목사는 이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의 나를 향한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했다.
노진준 목사는 이삭 번제에 대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얘기하실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주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며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오늘날 교회가 피곤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길 원하시는데, 자꾸 전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의와 사랑을 말할 때가 많다. 믿음 조차 우리의 의가 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적 원리지만 실제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힘이지 내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이 나의 의가 되는 것 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해보자. 어느 분이 저를 찾아 오셔서, 임상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 약을 먹으면 산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약을 먹었다. 그리고 진짜 다시 살았다. 오늘날 교인들 모습은 어떤가? 누가 약을 가져왔지, 내가 먹고 살았지. 저 인간들은 안먹는데 나는 먹고 살았잖아. 마치 내 믿음이 궁극적, 실체적 원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는 산상수훈의 엄정한 말씀 앞에, “저는 제가 못하는 것을 아는데 해 보고 싶다. 제가 넘어지는 줄 아는데 할 수는 없는데 해볼게요. 또 넘어질 것을 아는데 그런데도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게 감동을 준다. 100번을 넘어져도 그 은혜 때문에 다시 일어난다.”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 은혜 받으면 안 넘어지는 줄 안다. 진정한 은혜는 우리의 진정한 인간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지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은혜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