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 목사(감사한인교회 원로 목사)
김영길 목사(감사한인교회 원로 목사)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3).

애통하는 자는 문자 그대로 슬프게 우는 사람이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우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도와줄 사람이 없고, 스스로 원수 갚을 능력도 없는 무력한 사람이다. 또 다른 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악한 영의 세력이 내 자식을 어둠 가운데로 끌고 들어 가는데도 그 자식을 구해낼 능력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부모들이다. 행복했던 부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철천지원수가 되어 분노와 좌절 가운데 슬피 울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땀 흘려 모은 재산을 믿었던 사람에게 몽땅 사기당한 사람의 통곡 소리와 회한의 눈물이다. 잘못된 선택과 실수로 재산뿐만 아니라 신용과 체면까지 다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가슴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들이다. 몸이 병들어 애통하는 사람들도 있다. 통증으로 잠 못 이루는 환자의 아픔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죄를 범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며 수군거릴 때, 누가 그를 감싸고 대변해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나 때문에’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위로는, 애통하는 사람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울어주는 모습이다. 그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 보기 좋다. 싸다 싸!’ 하며 속을 뒤집어 놓지도 않고, 그냥 그의 옆에 앉아서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위로가 우리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준다. 다시 일어나고 싶은 열망이 피어오른다. 마음속에 ‘괜찮다. 아주 망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확신이 밀려온다. 우는 사람에게는 위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넘어질 때 붙들어주는 사람,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 부드럽게 마음을 만져주는 사람, 새로운 용기를 갖게 하는 사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에 살포시 웃어주는 사람, 그래서 나로 하여금 피식하고 웃게 만드는 사람, 함께 걸어가 주는 사람, 그런 위로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애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하나뿐인 아들의 상여를 따라가며 슬피 우는 나인성 과부, 동네에서 손가락질 당하던 소문난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집단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던 세리장 삭개오, 귀신에 사로잡히고 각종 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 한결같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령님은 위로자이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서 ‘위로하다’의 원문은 ‘파라칼레오’인데, 이 말에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라는 말이 나왔다. 보혜사는 ‘돕기 위해 곁에 와 계신 분’으로서 성령님을 가리킨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