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여호수아 24장 1절, 14절-31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여호수아는 마지막 고별사를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을 세겜 땅으로 다 불러 모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로에서 다 모여서 땅을 분배를 하고 난 후 약 15년-20년 만에 처음으로 모이는 모임이었다.(연도 추정이 어려움) 이들이 다같이 모일 일이 없었다는 것은 전쟁의 위험없이 편안하게 잘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겉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23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치워 버리고”라는 표현으로 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나고 편안한 삶이 오래 되면서 신앙에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왔는데 정작 우상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다.
우상숭배는 도덕적으로 나태한 삶과 신앙적으로 타락한 삶의 결과로 나타난 모습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 위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게 무슨 위기냐? 내 삶을 편안하게 너무 잘 즐기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위기냐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평안한 삶 속에서 위기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사람이 여호수아다. 영적 지도자는 현실만 보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흐름을 읽어가는 것이 지도자다. 그리고 그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 지도자다. 지도자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흐름을 읽는 눈을 가져야 한다. 내 인생의 흐름, 우리 가정의 영적이 흐름, 자녀들의 영적인 흐름을 읽어내고,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문제가 다 터지고 복구하려면 너무 힘들다. 치러야할 댓가가 너무 크다.
여수아의 고별사는 자기 임무를 끝내고 하는 일반적인 고별사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메시지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상소집해서 영적인 자극을 주고, 방향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여호수아는 세 가지를 했다. 첫 번째는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함께 모인다는 것은 항상 중요하다. 함께 모이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10명이 기도하는 것이 은혜가 되고, 10명이 기도하는 것보다 100명 1000명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더 힘이 있고 은혜가 넘친다. 모이면 서로의 모습에 도전과 충격을 받게 되고,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모임의 장소다. 여호수아는 세겜으로 모든 백성들을 다 불러모았다. 모이기에 편한 장소를 택하려면 길갈이 가장 좋다. 길갈은 요단강에 가까워서 동쪽편에 있는 지파들이 오기에 편한 장소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내내 전쟁의 베이스캠프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현재 중심지에 모이고 싶다면 실로가 적당하다. 하나님의 법궤가 있고, 성소가 있는 곳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모였서 땅분배를 하고 헤어진 곳도 실로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모을 장소로 선택한 곳은 세겜이라는 땅이었다. 세겜은 자만심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난 뒤에 영적인 하프타임을 가지러 간 곳이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나누어 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한 곳이 세겜이다. 세겜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한 곳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영적으로 나태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만나서 은혜 받으며 감격했던 그 장소로 데리고 간 것이다. 1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여호수아가 은혜를 받은 곳, 언약을 갱신한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하나님 앞에 서게 했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은혜 받았던 곳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거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했다. 여호수아는 고별사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수24:2-13) 여호수아는 왜 까마득한 조상인 데라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너희들의 존재를 알아라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방황하던 너희를,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너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해 주셨는지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이다.
어려웠던 시간이 지나고 삶이 편안해지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잊혀진다. 기억이 왜곡 되기도 한다. 마치 내가 고생하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때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는가?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당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2절과 13절을 보자.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요단강 어떻게 건넜나? 여리고 어떻게 무너뜨렸나? 태양과 달을 멈추신 분이 누구신가? 다 하나님이 하셨다.
이것을 한번 더 강조하기 위해서 20절의 이야기를 한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지금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제든지 다시 거두어 가실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살고 싶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셨던 하나님, 나의 인생 여정 길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결단하게 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결단을 하게 했다. 15절을 보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다 우상숭배 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기로 확실하게 결단하라는 말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세 번이나 결단을 반복하게 했다. 16절을 보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결단코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니까 너희들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 해다. 19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번째 결단을 했다. 21절을 보자.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두 번을 결단하면서 말했는데 여호수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게 세번째 결단까지 촉구했다. 24절을 보자.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세 번이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변치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이렇게 강력하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가 눈에 선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아가다가는 멸망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치 않고 약속을 지키게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왜 고별사에서 신앙에 대한 문제만 강조하는 것인가? 지금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 중에 시급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유랑민족이 아니라 정착했으니 국제정세도 고려해야 한다. 그 땅을 다시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이 사방에 남아 있다. 가나안 땅이 얼마나 힘들게 얻은 땅인가? 그런데 왜 그 땅을 잘 지켜라, 후손 대대로 물려 주어라고 말하지 않은가? 왜 그렇게 중요한 땅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신앙만 굳게 지켜라고 하는 것인가? 땅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지킬 것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죽음의 땅에서 불러내시고,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모세를 통해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지날 때와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늘 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고 계셨다. 전쟁을 할 때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친히 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전쟁을 이기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정도 자녀들도 사업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가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때 지켜진다. 이것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종처럼 살다가 인생을 다 허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살지 못하고 죽는 비참한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 이민와서 돈 없으면 죽을까봐 돈을 죽도록 벌고, 자녀들이 잘못되면 죽을까봐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 걸고,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지면 죽을까봐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죽게 된다. 죽기를 무서워 함으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것이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종노릇에서 놓아주시려고 구원해 주셨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고 하셨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운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살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31절을 보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우리가 이렇게 살고,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살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영적인 눈을 뜨고 여러분을 위해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하면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