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10장 1절-15절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않게 큰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나의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괴롭다. 이럴 때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보통은 옷을 벗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진다. 또 어떤 경우는 스스로는 도저히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린다. 참 못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자리에서 물러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진짜 책임을 지는 것인가? 겉으로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벌을 받았으니까 문제가 매듭지어진 것 같은데 오히려 문제를 더 깊고.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러났고, 사람은 죽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지휘관들에 대해서 처리하는 모습이 나온다.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지휘관이 옷을 벗고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대패를 당하고 와도 해임시키지 않고 다음 전투가 있으면 그 사람을 다시 지휘관으로 임명을 한다. 겉으로 보면 로마인들이 실패에 대해서 굉장히 관대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잘못에 대해서 더 무겁게 책임을 지게 하는 문화이다.
지휘관이 가장 수치러워울 때는 자신의 잘못으로 전쟁에서 패했을 때다. 특히, 자신의 무능함이나 실수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은 자기 때문에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자기는 여전히 지휘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로마인들에게 이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로마인들이 패전한 지휘관을 해임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를 회피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의미였다.
여호수아는 최근에 두 가지의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아이성 전투에서는 자만심을 부려서 패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호수아는 또 한번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9장) 기브온 족속에게 속아 넘어가서 맺어서는 안되는 평화 조약을 맺어 버렸다. 이것은 지도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뼈아픈 실수였다.
여호수아의 실수 때문에 가나안 땅 남쪽 지역을 점령하려고 갔다가 공격하지 못하고 다시 길갈로 돌아와야 했다. “17. 이스라엘 자손이 행군하여 셋째 날에 그들의 여러 성읍들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성읍들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수9:17-18) 여호수아의 실수로 가나안 땅 정복 작전에 차질이 생겼고, 백성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자기들을 속이고 동맹을 맺었던 기브온 족속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남쪽에 있는 다섯 나라의 왕들이 자기들을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붙은 기브온 족속을 응징하기 위해서 공격을 한 것이다. 3절과 4절을 보자. “3.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이르되. 4.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가나안 남쪽의 다섯 왕들에게 기브온 족속의 항복은 너무나 큰 배신이었다. 기브온 족속의 크기, 기브온 족속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위치로 봤을 때 가나안 땅에서 기브온 족속이 차지하는 중요도는 너무나 컸다.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읍이었다.(2절) 기브온 족속이 항복하면 가나안 땅의 남쪽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다.만약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과 연합군을 형성해서 자기들을 공격한다면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그런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다섯개 왕들이 연합해서 기브온 족속을 공격해서 제압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기브온 족속이 다섯 부족의 왕들의 동맹군이 쳐들어 온 것을 보고 다급해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6절을 보자.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의 구원요청을 받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 기브온 족속이 사라지면 여호수아는 자신의 잘못을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다.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는 죽이지 못했는데, 가나안 다섯 부족의 왕들이 공격해서 다 죽여주겠다니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나? 눈만 한번 질끈 감고 그 구조요청을 무시해버리면 자기의 잘못한 증거가 영원히 묻혀버리게 된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다섯 부족의 왕들의 연합군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도 부담되고 두려운 일이었다.
이때 여호수아의 선택이 8절에 나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여호수아는 자기의 잘못을 숨기고, 덮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기 방식으로 자기 잘못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지대로 따랐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스라엘 군대에 출전명령을 내렸다.(7절)
이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셨다.
10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륙하고 벧 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실수한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위축되었겠나?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여호수아에게 담대함과 확신을 주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셔서 적들을 이기게 하셨다.
사람이 잘못을 하고 죄를 지으면 위축이 되고,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덮으려고 한다. 이때 여지없이 사탄이 공격해서 죄책감을 이용해서 우리를 무너뜨린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여놓고 그것을 따먹으니까 사탄이 그 마음속에 죄책감을 심어버렸다. 사탄은 항상 이런식이다. 속이고 유혹하는 것도 사탄이고, 그 말에 넘어가면 바로 죄책감으로 심어서 공격하는 것도 사탄이다.
사람들은 죄책감이 들면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의 행동을 보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의 잘못을 가려 보려고 했다. 그런데 가릴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숨어서 자기 잘못을 회피하려고 했다. 이 순간부터 사탄은 죄책감을 무기 삼아서 자기 노예로 만들고 하나님께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게 한다.
죄책감은 가리고 피한다고 해서 극복되지 않는다. 아무리 후회해도 자기가 한 짓을 되돌릴 수 없다. 한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을 이기고, 사탄의 공격을 이기는 길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나가서 용서받고 용납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입은, 수치를 가릴 수 없는 무화가 나무잎을 벗겨 주시고,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가죽 옷을 입혀주셨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늘 과거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지만, 용서받은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책임지고,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가룟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고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다. 책임질 수 없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못난 선택을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와서 용서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용서의 선언이다.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 십자가는 정죄받은 자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쉼을 얻게 된다. 새로운 살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두려움을 무렵쓰고 나갈 때 실제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11절을 보자.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 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여호수아가 죽을 힘을 다해서 전쟁했다.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능력을 넘어 일하셨다. 전쟁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칼로 죽인 적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박을 내리셔서 우박에 맞아 죽은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말로 하는 감정적인 위로와 격려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도우시는 분이시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뒤에서 밀어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이 났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신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말씀하신 것을 실제로 이루시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적자원, 물적자원을 다 주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최고의 상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이날 전쟁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12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전쟁이 길어지는데 물리쳐야 할 적들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전쟁 중간에 해가 져서 밤이 되면 더 이상 적들을 물리칠 수 없고, 지리에 익숙한 적들에게 오히려 공격당할 수 있는 위기가 찾아온다.
이때 여호수아 입에서 터져나온 말이 “태양과 달아 멈추어라.”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해서 내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누가 태양을 멈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태양에게 멈추어라고 한다고 태양이 멈추는가? 그런데 이 말이 여호수아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놀랍게도 여호수아의 명령에 태양과 달은 멈추어 섰다. 13절을 보자.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여호수의 생각도 아니었고, 여호수아가 스스로 한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생각과 입을 붙잡고 역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생각과 입에 말을 넣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여호수아를 잡고 사용하신 것이다. 14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잡고 쓰신다. 사도행전 오순절날 역사속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다. 요엘서의 예언을 성취하고, 언어가 다른 15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태양과 달까지 멈추시면서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나? 이 전쟁이 남부의 가장 강력한 다섯 부족을 한꺼번에 점령하는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땅 점령하기 위해서 상대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적들을 상대하는 전쟁이었고, 가나안 땅 정복을 승리로 기울게 하는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우리는 이 승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의 실수로 부터 시작되었다. 여호수의 실수로 가나안 땅 정복이 차질이 생길 뻔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붙들고 사용하셨다.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했더라도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은 충분히 역전시키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일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가 간절히 간구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로잡고 사용하는 인생이 되시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