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 신학교 동쪽으로 30분 남짓 드라이브하면 캔자스 시립 도서관에 이른다.
이 도서관에 한국교회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스카릿 성서학원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 사진 한 장이 호젓이 담겨 있다. 19세기 말에는 다들 4년간 신학교에 몸담아 성서 원어와 성경 해석학을 배운 후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는 종래의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시작했다. 대신 2년간 집중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곧 바로 짐을 싸는 선교가 대세였다. 우후죽순으로 성서학원이 들어섰다. 무디 D.L. Moody는 무디성서학원을, 고든 A.J. Gordon은 훗날 고든콘웰신학교가 될 성서학원을 열어, 와일더 Robert Wilder와 모트 John R. Mott가 발굴한 선교자원학생들을 훈련시켰다. 영혼구원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오늘날 남반구의 기독교인과 자원의 총량이 북반구를 압도하는 역전을 낳기까지 북반구의 과단성 있는 선교운동이 있었다. 스카릿 성서학원 역시 캔자스 시티에 우뚝 서 북미와 해외로 보낼 수많은 선교사를 양성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행보였다. 이 학교에 낯선 한 학생이 입학했다.
그 학생이 모태에서 갓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섭섭이” 외에 달리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실망에 겨운 나머지. 그런 채로 남들처럼 십대에 시집을 갔다. 새 서방은 삼 년 후, 십대인 그녀와 세 살 박이 딸을 뒤로 남기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졸지에 과부 에미가 된 그녀는 또 다른 과부인 칠 순 모친과 상동교회를 찾았다. 상동교회는 스크랜턴 William Scranton의료 선교사가 세워 모친 스크랜튼 Mary Scranton과 협력사역으로 세워졌다. 스크랜튼은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오십 훌쩍 넘어 한국선교를 감행했고 한반도 전도여행을 마다하지 않으며 여성을 위해 맹활약을 벌였다. 부인반을 열자 사정이 비슷한 과부들이 마음을 열고 성경을 배웠다. 십대의 “섭섭이”도 이때 세례를 받아 “미리사 Melisa”라는 이름을 얻었다. 치맛자락을 맴도는 어린 딸과 교회를 다니던 미리사는 세간에서 무슨 귓속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교회의 과부 선배가 해외 유학을 권하자 귀를 기울였다. 마침 박 에스더가 한국 최초로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대를 마치고 서양의 전문의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세례 후 점동이가 에스더로 된 케이스이다. 1896년 볼티모어로 가서 1900년 귀국한 23세의 여의사 박에스더는 22 세의 미리사에게 한 줄기 선연한 빛이었다.
미리사는 이듬해 1901년 중국 행 선박에 올랐다. 마침 훗날 감리교 초대 감독이 될 양주삼이 동승하였다. 둘은 상해의 중서서원 문을 두드렸다. 한문에 능통했던 양주삼은 합격했지만, 한글만 깨우쳤던 미리사는 탈락했다. 대신 남감리교의 버지니아 여학교가 문을 열어주었다. 영어도, 한자도 새로 배우던 미리사에게 뇌막염과 청각장애가 생길 정도로 고된 학업이었다. 중국에서 4년간 신학공부를 마치니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미국유학이 시작된 1910년 스카릿 성서학원 교실에 들어서자 인생 최고의 행복한 시절이 펼쳐졌다. 배움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녀는 기숙사를 “평화와 기쁨의 집” 이라 칭했다. 짧다면 짧은2년. 미리사는 바로 이 곳에서 천만 한국여성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 교양교육은 고사하고 한글도 배우지 못해 아무런 경제능력을 갖출 수 없었던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무수한 한국여성들, 바로 그들을 위한 꿈이었다.
귀국 후 동아일보에 글을 실었다. 1921년 2월 21일자 신문지상에 “일천만의 여자에게 새생명을 주고자 하노라”를. 딸 하나 딸린 과부의 웅대한 포부였다.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기백이 부족함을 근심하노라”고 한탄한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 아낙네들과 연대했다. 나라의 인재들은 법조문 운운하며 나라를 팔아먹던 그 시절이다. 미리사는 과부로 내한한 선교사 캠벨 Josephine Campbell이 세운 배화학당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예배당 아래층에서 부인 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했다. 전조선을 망라하며 순회 강연을 실행하고 84일간 67고을에 흩어진 여성들을 일깨웠다. 13명이 모인 야학에 곧 156 명의 부인들이 찾아왔다. 사회의 냉정한 시선을 견디며 힘들게 삶을 일구던 여성들을 위해 <여자시론>을 출간하였다. 야학이 근화여학교로 발돋움했다. 해외자금의 지원없이 순전히 한국여성들이 협력하며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을 살리겠다는 결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보며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근화여학교가 동덕여자대학교로 발전했다. 이화여자대학교를 세운 스크랜튼과 동덕여자대학교를 건립한 차 미리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여성과 연대하며 대한독립정신으로 띠를 두른 교육전당을 발족시켰다.
한 때 이어령 선생님이 딸에게 고백하였다.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으로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네가 애통하고 서러워할 때 내 머릿속의 지식은 검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 손에 쥔 지폐는 가랑잎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다. 70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가족만이 아니다. 너는 법정에서 그동안 죄 지은 불쌍한 젊은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이제는 법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총의 힘으로 가난한 이웃, 애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해야 할 것이다.” 차 미리사의 질곡은 어쩌면 함께 수난의 길을 걸어온 천만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도록, 날개 잃은 가족 넘어 디뎌야 할 영혼의 문지방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카릿 성서학원은 성서 안에서 그 꿈을 품도록 나라 잃은 이방 학생을 환대하였다.
이연승 교수는 현재 센트럴 신학교의 교회사 분과장이며, 보스톤 대학교 세계기독교와 선교연구센터의 초빙연구원이고, 보스톤 주님의 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