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이 최고로 뽑는 자세 가운데 하나가 경청이었기에 한동안 경청 열풍이 있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표현이기 때문에 말을 잘 들어주는 자세야 말로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서 일단 말을 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경청에 목숨 거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진짜는 경청이 핵심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경청하느냐? 더 중요한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세상 말 다 들으란 말 아닙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넘어가야 할 말, 통과시켜야 할 말, 그걸 다 경청하면 인생은 황무지 됩니다. 비 진리를 무시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절도 수락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존 타운센드와 헨리 클라우드라는 분이 함께 쓴 "NO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거절을 통해서 확실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 합니다. 경계심이 없는 무조건적인 열심이나, 경계심 없는 무조건적인 집중은 허무로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가 된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것은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나치게 예민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다거나. 남의 시선에 대해서 너무 예민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좋은 의미로 말해서 둔 감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둔 감력이 세상의 흐름에서 건짐을 받고, 스스로의 소모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뭘 들어야 하나? 하는 겁니다. 세상은 과거와 상처에 집중하게 만들고. 과거가 지배하게 합니다. 상처를 들춥니다. 과거가 오늘을 결정하게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예수님이 무시를 합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울며 심히 통곡합니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을 결정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 게 아니고 잔다고 미래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미래의 살아남을 말씀하고. 다시 살게 될 목적을 말씀합니다.
한 태근 씨가 쓴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라,"에서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차이를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에 집중함으로. 과거 상처가 나를 형성하고. 과거가 나를 만든 다는 겁니다. 마귀의 정죄 시각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아들러는 올바른 목적을 위한 고난을 말합니다. 지금의 고난은 미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룰 줄 알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거의 상처를 뛰어넘어,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 뛰며 목적을 향해 삶을 던지라는 겁니다. 오늘은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미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