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루돌프 브렌들레(Ludolf Brandle) 박사는 요한 크리소스톰의 생애를 다루는 책을 썼다. 브랜들레는 책의 부제를 '고대 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이라고 붙였다.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는 크리소스톰 시대에 이미 개혁이 필요한 상태였다.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강하게 역사했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태가 있었다.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되었던 것도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불행한 갈등이었다. 사도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 교회는 한 마음으로 교회 갈등을 해결했다. 그 해결책은 사도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곱집사를 세우고 그들에게 나눔의 사역권을 양도한 것이다. 타락한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언제나 부패와 타락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교회의 건강함을 추하며 개혁을 추구한다. 교회 개혁은 건강한 신앙인의 숙명이다.

세계 선교를 시작했던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의 상징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4세기 중반에도 비교적 건강한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번성하는 국제 무역도시였던 안디옥은 여전히 다양한 이교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교도의 도시였다. 크리소스톰에게 인문학을 가르쳤던 리바니우스는 안디옥을 신들의 도시라고 말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크리소스톰은 A.D. 367년 여름에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인문학 수업을 마치고 368년 사순절 기간에 세례교육을 받고 그해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요한 크리소스톰은 금욕과 고행자 동아리를 이끄는 디오도루스의 제자였다. 훗날 바울의 고향 다소의 주교가 되었던 디오도루스는 젊은 금욕 고행자들을 훈련 시키며 성경을 가르쳤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스승 디오도루스는 당대 안디옥 학파 대표자다. 성경 본문에 충실한 해석을 했던 안디옥 학파는 알레고리 해석을 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대조되는 학파다.크리소스톰이 성경 본문에 충실했던 안디옥 학파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젊은 날에 금욕과 고행을 훈련받았고 철저한 성경 교육을 받은 요한 크리소스톰은 건전한 교회 개혁가로 성장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교회에서 인정받는 젊은이였다. 그가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의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애지중지 양육한 아들이 성공적인 변호사로 시청의 관리로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를 두 번이나 과부로 만들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이 그의 수도자 길을 막았다.

하지만 요한 크리소스톰은 금욕과 수행의 삶을 지속해서 추구했다. 도시 밖의 산에서 수도원의 원조였던 '거룩한 이들의 움막'에 장기간 머물렀다. 헬레노폴리스 주교를 지낸 팔라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전기에서 요한 크리소스톰이 관능의 정욕을 극복한 뒤, 여덟 달에 세 차례씩 한 동굴에 은거했다고 전한다. 요한의 금욕 생활은 약간 극단적이었다. 그는 잠을 아주 조금 잤고, 때로는 앉아서 잤다. 단식도 극단적으로 했고 그래서 건강을 크게 잃기도 했다.

그는 영적으로 위축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유언(복음서로 추정됨)을 암송했다. 2년 후에 중병이 걸려서 이런 고행을 그만두었지만, 그는 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을 당했다. 당시 이런 금욕 수행이 일종의 유행이었고,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런 영적 분위기의 선두 주자 중의 하나였다.
당시는 수도와 경건 훈련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높은 기둥 꼭대기 위에서 수도하는 주상(柱上) 혹은 주두(柱頭) 수도가 유행했다. 당시 대표적인 주두 수도사 시메온은 20m 기둥에 자신을 묶고 수십 년간 서서 수도를 했다. 이런 수도 활동이 주목을 받는 시대에 요한 크리스소톰은 많은 성도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요한은 멜레티우스 주교에 의해 부제로 서품을 받는다. 크리소스톰의 전기 작가 루돌프 브렌들레는 안디옥 교회에 7명의 부제가 있었다고 전한다. 크리소스톰은 5년간 부제로 있었는데 이 기간에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이 시대에 저술 활동으로 논리를 세우고 민중을 설득한 것이 크리소스톰의 인문학적 소양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 기간에 쓴 책이 호교서 <율리아누스와 이교도들과 맞선 성 바빌라스에 관하여>다. 요한은 이 책에서 자기 시대에 강력히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찬미했다.

아울러 요한 크리소스톰은 <동정(童貞)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과격한 금욕적 가정생활 원칙을 제시한다. 요한은 이미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고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출산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금욕적 결혼 생활을 촉구했다. 그는 경건한 삶을 위해 성생활 없는 결혼을 주문했었다. 따라서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윤리가 특별하고 과격하다고 한다.

AD 386년 사순절 전에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설교자로 임명받았다. 멜레티우스 주교가 소천한 후에 부임한 플라비아누스 주교도 요한의 신실과 잠재력을 인정하고 그를 사제와 설교자로 세운 것이다. 요한은 설교자로 등장하면서 그는 황금의 입 "크리소스톰"으로 불릴 만큼 명 설교가로 부상했다. 그의 힘있고 화려한 설교가 안디옥의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안투사의 기도와 신실함, 리바니우스의 인문학, 데오도루스의 성경과 수행 교육 그리고 멜레티우스와 플라비아누스의 목회의 영향을 받아 성숙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폭넓은 안목과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건강한 지도자의 자질을 함양한 그는 고대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요한은 탁월한 언변, 인문학 훈련 그리고 건전한 신앙 훈련을 바탕으로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다. 나아가 요한 크리소스톰은 약자와 빈자를 돌보며 부정한 권력에 저항했던 따뜻함과 야성을 겸비한 목회자였다. 요한은 4세기를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었고 크리소스톰의 명성은 안디옥을 넘어 로마의 황실까지 전해졌다.

img 

It is significant that Chrysostom was influenced by the Antioch School, which was faithful to the text of the Bible.